비 갠 뒤의 에페소스: 셀축 고대도시를 위쪽 문에서 아래로 걸어 내려간 하루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셀축(Selçuk)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반쯤 갈라져 있었다. 튀르키예 에게해 지역의 3월은 이렇다. 아침엔 언덕이 초록으로 번들거리고 오후엔 먹구름이 한 덩어리씩 지나간다. 에페소스 고대도시는 그 언덕 사이에 통째로 눕혀져 있는데, 처음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아래쪽 문(하부…
셀축 · 에페소스 고대도시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셀축(Selçuk)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반쯤 갈라져 있었다. 튀르키예 에게해 지역의 3월은 이렇다. 아침엔 언덕이 초록으로 번들거리고 오후엔 먹구름이 한 덩어리씩 지나간다. 에페소스 고대도시는 그 언덕 사이에 통째로 눕혀져 있는데, 처음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아래쪽 문(하부 입구)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위쪽 마그네시아 문 쪽에서 시작해 켈수스 도서관과 대극장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같은 길인데 오르막이 없다. 이 차이가 하루 체력을 다 결정한다.
내려오는 내내 발밑이 대리석이었다. 비가 그친 직후라 포장돌이 젖어 미끄러웠고, 실제로 앞서 가던 사람이 한 번 크게 휘청였다. 여기는 운동화 아니면 곤란하다.
국가 아고라와 줄지어 선 기둥들 — 사람이 가장 적은 구간
위쪽 문을 통과하면 처음 만나는 게 국가 아고라 일대다. 여기가 에페소스에서 가장 한산하다. 대부분의 단체팀은 도서관 사진 찍는 데 시간을 몰아 쓰기 때문에, 이 구간은 거의 통과하듯 지나간다. 나는 반대로 여기서 20분 넘게 서 있었다. 물 고인 바닥에 기둥이 반사되는 모습이 꽤 좋았다.
기둥을 바짝 붙어서 올려다보면 재질이 층마다 다른 게 보인다. 흰 대리석 드럼 사이에 누르스름한 석재가 끼어 있는데, 무너진 걸 다시 세우면서 남은 조각을 이어 붙인 흔적이다. 완벽하게 복원된 게 아니라 '이어 붙인 티가 나는' 상태 그대로 서 있는 게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오데온 — 앉아서 소리를 시험해 볼 것
조금 더 내려가면 반원형 좌석이 나온다. 오데온(소극장)이다. 대극장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나는 여기가 더 좋았다. 규모가 작아서 사람 목소리가 실제로 어떻게 도는지 몸으로 확인이 된다. 아래 오케스트라 자리에 서 있던 가이드가 평범한 톤으로 말했는데 맨 윗줄까지 그냥 들렸다. 마이크 없이.
오데온 바닥은 이날 흙바닥이었고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내려가서 가운데 서 보고 싶었지만 물이 고여 있어서 포기했다. 비 온 다음 날이면 이럴 수 있다.
안내판을 그냥 지나치지 마라 — 프리타네이온과 아르테미스
에페소스 안내판은 튀르키예어·영어·독일어 세 언어가 함께 적혀 있고, 평면도와 발굴 당시 사진까지 붙어 있다. 프리타네이온 앞 안내판에는 이런 숫자들이 있었다. 로도스 타입 페리스틸 안뜰이 33×28m, 프리타네이온으로 들어가는 열주 안뜰이 26×22m, 서쪽의 연회용 혹은 주거용 공간이 14×11m. 조성 시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7년~기원후 14년)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온 게 셀축 에페소스 박물관에 있는 그 유명한 '아름다운 아르테미스' 상이다. 판 아래쪽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2015년) 표시와 오디오 가이드 번호 06이 함께 붙어 있다.
참고로 저 붉은 앰뷸런스 번호판, 유적 안 곳곳에 있다. 처음엔 왜 이렇게 눈에 띄게 붙여놨나 싶었는데, 그늘이 거의 없는 지형이라 여름엔 실제로 필요할 것 같았다. 왼쪽에 '출입 금지(GİRİLMEZ / NO ENTRANCE)' 표지도 함께 있었다.
위치와 접근 — 셀축 시내에서의 현실적인 이동
에페소스 고대도시는 셀축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다. 걸어갈 수는 있지만 갓길이 좁고 차가 빠르게 지나가서 권하지 않는다. 나는 셀축 오토가르 근처에서 돌무쉬(미니버스)를 탔다. 택시도 흔하고, 대부분의 단체 투어 버스는 위쪽 문에 내려주고 아래쪽 문에서 태운다. 개인 여행자라면 이 동선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게 최선이다. 위쪽에서 내려 아래쪽으로 나온 뒤, 아래쪽 문 앞에서 다시 시내로 들어가는 교통편을 잡으면 된다. 입장료와 테라스 하우스 별도 요금, 개장 시간은 시즌마다 바뀌므로 방문 직전 현장 또는 공식 매표소에서 확인하는 걸 권한다.
멤미우스 기념비에서 헤라클레스 문까지
내리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에 멤미우스 기념비가 있다. 멀리서 보면 그냥 무너진 돌무더기 같은데, 가까이 가면 조각상 부조 세 점이 남아 있는 게 보인다. 앉은 인물, 서 있는 인물, 그리고 아래쪽에 옷자락만 남은 한 점. 얼굴은 거의 다 깎여 나갔다.
바로 아래에 니케 부조가 있다. 승리의 여신이 한 손에 화관을 들고 날개를 편 자세인데, 이게 나이키 로고의 원형이라는 얘기를 가이드들이 꼭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실물은 생각보다 크고 옷 주름 조각이 놀랍게 살아 있다. 원래 헤라클레스 문 위쪽에 얹혀 있던 부재가 지금은 땅에 내려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어서, 오히려 눈높이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로프가 쳐져 있으니 만지지는 말 것.
쿠레테스 거리 — 고양이가 주인인 구간
헤라클레스 문을 지나면 그 유명한 쿠레테스 거리다.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마주치는 건 유적이 아니라 고양이다. 에페소스 고양이들은 관광객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녀석은 대리석 블록 위에 깔린 천 조각을 자기 침대로 접수하고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사람이 20cm 앞에서 셔터를 눌러도 눈 하나 안 떴다.
거리 중간의 트라야누스 샘은 반쯤만 서 있다. 코린트식 주두가 얹힌 기둥 두 개가 페디먼트를 떠받치고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앞마당에 순서대로 눕혀져 있다. 원래는 여기서 물이 쏟아졌다는데, 지금은 바닥 수조 자리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뒤쪽 언덕에 발굴용 크레인이 서 있는 게 그대로 보이는데, 이 도시가 아직도 '작업 중'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실감났다.
뱀 지팡이 부조 앞에서
거리 한편에 세워진 대리석 판 하나가 유독 사람들을 모았다. 지팡이를 두 마리 뱀이 감고 올라가는 부조인데, 위쪽에는 잎사귀 문양이, 테두리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의술의 상징이고, 이 근처가 의료와 관련된 구역이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판 상단에는 그리스 문자 명문 일부가 얕게 남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팁. 에페소스는 단체팀이 이어폰 수신기를 쓴다. 개인 여행자라면 이 무리 뒤에 몇 분만 붙어 있어도 꽤 많은 걸 얻어 들을 수 있는데, 솔직히 이게 좀 민망하다. 나는 결국 안내판을 하나하나 읽는 쪽으로 돌아섰고, 시간은 더 걸렸지만 그게 더 나았다.
바닥에 그려진 바퀴 하나
길 옆 나무 데크 아래, 좁은 통로에 대리석 판 하나가 눕혀져 있다. 붉은 안료로 원을 여섯 조각으로 나눈 바퀴 문양과 그리스 문자가 그려져 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이 쓰던 상징으로 알려진 것이다. 바로 아래에 물고기 모양도 함께 그려져 있다. 유적 전체에서 가장 작고 가장 눈에 안 띄는 것 중 하나인데, 데크 난간에 기대 내려다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친다.
모자이크 포장길과 목욕장 구역
테라스 하우스 보호 지붕이 보이기 시작하면 발밑이 갑자기 화려해진다. 기하학 무늬 모자이크가 깔린 포장이 꽤 긴 구간 이어지는데, 붉은색·검은색 타일로 짠 문양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람들이 그 위를 그냥 밟고 지나간다는 게 좀 아찔했다. 왼쪽으로는 붉은 벽돌과 석재를 섞어 쌓은 벽체, 아치 구조가 층층이 남아 있다.
켈수스 도서관 — 사진이 안 되는 이유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서 켈수스 도서관 정면이 통째로 나타난다. 2층으로 쌓아 올린 파사드, 아래층 벽감 네 곳에 서 있는 조각상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마제우스·미트리다테스 문. 여기서 솔직히 적어두자면, 나는 이 장면을 제대로 못 찍었다. 정면 광장은 항상 사람으로 차 있고, 전체를 담으려면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물러나면 앞쪽 무너진 돌더미가 걸린다.
대신 아래로 내려가 계단 근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가 훨씬 나았다. 기둥 몸통의 대리석 결이 그대로 드러나고, 뒤쪽 언덕에 선 사이프러스 두 그루가 프레임에 들어온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이 각도에서는 그들이 오히려 크기를 알려주는 장치가 된다.
도서관 앞 광장은 이 유적에서 가장 넓게 트인 자리이기도 하다. 젖은 포장석이 하늘을 반사하는 걸 보고 한참 서 있었다. 왼쪽으로는 계단과 무너진 아치, 오른쪽으로는 코린트식 기둥 세 개가 남은 구조물이 있고 그 뒤로 현대식 보호 지붕이 붙어 있다. 고대와 철골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데, 이게 에페소스의 진짜 얼굴이다.
대극장, 그리고 사람들이 잘 안 보는 뒷골목
항구 대로 방향으로 꺾으면 대극장이 언덕에 박혀 있다. 규모가 압도적이라 카메라 한 프레임에 안 들어간다. 관중석 상단은 지금도 보수 중이라 흰 비계와 철제 구조물이 서 있었다. 무대 건물은 거의 무너져서 벽체 아랫부분과 통로 아치 정도만 남았고, 그 앞으로 잘라낸 석재들이 밭처럼 널려 있다.
대극장 주변에서 인파를 벗어나면 좁은 통로가 몇 개 있다. 그중 한 곳 끝에 화환 무늬가 새겨진 석관이 놓여 있었다. 반원형 화환 세 개와 그 사이의 원반 장식이 또렷하고, 뚜껑은 한쪽이 깨져 있다. 양쪽 벽 사이 폭이 2m 남짓이라 사람이 거의 안 들어오는데, 여기가 이날 가장 조용한 자리였다.
또 하나. 상인방에 십자가가 새겨진 출입구를 만났다. 로마 도시 한복판에 비잔틴 시대의 흔적이 겹쳐 있는 자리다. 문 안쪽으로 계단이 이어지는데, 위로 올라가는 길인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인지 표지가 없었다. 이런 게 에페소스에 꽤 많다.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지나가는 구조물이 절반쯤 된다.
다녀와서 정리한 것들
- 동선은 위→아래. 이 하나만 지켜도 체감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 바닥이 전부 대리석이다. 비 온 다음 날은 미끄럽고, 마른 날은 반사광이 세다. 밑창 있는 신발과 선글라스.
- 그늘이 거의 없다. 사진 속 큰 나무들도 3월엔 잎이 하나도 없었다. 여름엔 물과 모자가 선택이 아니다.
- 안내판을 읽는 데 시간을 배분해라. 3개 국어 + 평면도 + 발굴 사진이 들어 있어서, 가이드 없이도 절반은 따라갈 수 있다.
- 요금·운영시간은 반드시 현장 확인. 시즌마다 바뀌고 테라스 하우스는 별도다. 여기서 본 것만 적자면, 나는 확인하지 않고 갔다가 매표소에서 한 번 헤맸다.
총 세 시간 반 정도 걸었다. 유적을 다 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구간에서 뭘 놓쳤는지 목록만 늘어났다. 다시 온다면 오전 개장 직후에 들어와서 국가 아고라 쪽에 한 시간을 통째로 쓸 생각이다. 그때는 아마 고양이가 다른 돌 위에서 자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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