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괴레메, 제미 호텔(Zemi Hotel Cappadocia) 앞 언덕에서 신라면 블랙 끓여 먹은 이야기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괴레메(Göreme)에는 여름이 성수기다. 나는 2월에 갔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계곡 능선에 서리인지 눈인지 모를 흰 가루가 얇게 깔려 있는 시기. 결론부터 말하면 비수기를 택한 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사람이 적으니 언덕 전망대를 통째로 혼자 썼고, 호텔 테라스에도 나…
괴레메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괴레메(Göreme)에는 여름이 성수기다. 나는 2월에 갔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계곡 능선에 서리인지 눈인지 모를 흰 가루가 얇게 깔려 있는 시기. 결론부터 말하면 비수기를 택한 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사람이 적으니 언덕 전망대를 통째로 혼자 썼고, 호텔 테라스에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숙소는 괴레메 마을 외곽 언덕에 있는 제미 호텔(Zemi Hotel Cappadocia)이었다.

정문에 서면 바로 보이는 게 있다. 호텔 건물 오른쪽 옆구리에 커다란 응회암 바위가 그냥 붙어 있다. 깎아내지 않고 건물이 바위를 피해 지어졌다. 진입로는 회색 돌포장이고, 라벤더인지 로즈마리인지 회백색으로 마른 관목이 돌화단에 심겨 있다. 2월이라 잎은 다 말라 있었는데, 그 마른 회색이 응회암 색과 붙으니 오히려 어울렸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게 전부 계곡이다
체크인하고 로비를 지나 바깥 테라스로 나갔다. 여기가 이 호텔의 진짜 값어치다. 난간 너머로 정면에 요정굴뚝(fairy chimney) 능선이 통째로 펼쳐진다. 바위 벽면에 뚫린 검은 구멍들 — 옛날 사람들이 파고 살던 동굴 자리 — 까지 육안으로 보인다. 오후 늦은 빛이 들어오면 응회암이 살구색으로 물드는데, 이게 하루 중 제일 예쁜 시간이다.

테라스 한복판에 검은 철제 안내판이 서 있고, 'SWIMMING POOL', 'ZEMİ RESTAURANT', 'POOL BAR'가 모두 왼쪽 화살표로 표시돼 있다. 2월에 수영장은 물을 뺐거나 아예 닫혀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수영장 보고 예약할 계절은 아니다. 대신 민트색 철제 의자와 테이블이 테라스에 그대로 나와 있어서, 낮에 해가 드는 동안은 겉옷 하나 걸치고 앉아 있을 만했다. 바닥 돌포장 일부는 서리가 녹다 만 자국으로 얼룩덜룩했고, 이른 아침엔 실제로 미끄러웠다. 슬리퍼 말고 밑창 있는 신발 신고 나가시길.

넓은 테라스에 의자가 열 개 넘게 놓여 있는데 앉은 사람이 나뿐이었다. 나무는 죄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았고, 그 사이로 침엽수 한 그루만 초록으로 서 있다. 비수기의 정직한 풍경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이 조용함은 7~8월엔 돈 주고도 못 산다.
선라이즈는 호텔 앞 언덕으로 걸어 올라가라
여기서부터가 이 글에서 제일 하고 싶은 얘기다. 제미 호텔 앞쪽으로 걸어 나가면 오르막 능선이 있다. 응회암 지형이라 길이랄 것도 없이 완만한 바위 등성이를 밟고 올라가면 되는데, 그 위에 서면 괴레메 마을 전체와 그 뒤 설산 능선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유료 선라이즈 포인트에 차 타고 갈 필요 없이, 숙소에서 걸어 나가 만나는 전망이다.

2월 새벽의 이 언덕은 온통 파랗다. 지면에 하얗게 서리가 깔려 있고, 아직 해가 안 넘어와서 그림자 색이 그대로 화면 전체를 덮는다. 그러다 저 멀리 설산 능선 위쪽부터 분홍빛이 먼저 들어온다. 마을 흰 건물들에 불이 켜져 있고, 앙상한 나무들이 서리 위에 검게 서 있다. 손가락이 시려서 셔터를 몇 번 놓쳤다. 장갑, 진심으로 챙기시라. 나는 안 챙겼고 후회했다.
그리고 이 언덕에서 해야 할 일 — 컵라면이다.

한국에서 짐에 넣어 간 농심 신라면 블랙 사발. 방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뚜껑을 덮고, 겉옷 안에 품고 언덕까지 올라왔다. 도착해서 뚜껑을 여는데 김이 확 올라오면서 사골 냄새가 영하의 공기에 퍼졌다. 뒤로는 요정굴뚝 실루엣과 아직 불 켜진 마을. 손은 시린데 국물은 뜨겁고, 국물을 넘길 때마다 몸 안쪽부터 데워지는 그 감각. 카파도키아에서 먹은 어떤 식사보다 이게 오래 남았다.
솔직한 실패담도 적어둔다. 방에서 물 받아 언덕까지 올라오는 동안 면이 예상보다 더 불었다. 다음에 간다면 물을 붓지 말고 컵라면과 보온병을 따로 들고 올라가서 현장에서 붓겠다. 그리고 쓰레기는 반드시 되가져와야 한다. 여기는 관리인이 치워주는 관광지가 아니라 그냥 마을 뒷산이다.
위치와 접근성 — 마을까지는 걸어갈 거리가 아니다
제미 호텔은 괴레메 마을 중심에서 떨어진 언덕 쪽에 있다. 이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장점은 위에 쓴 그대로 — 창밖과 앞마당이 전부 계곡이고, 선라이즈 언덕이 도보권이다. 단점은 저녁 먹으러 마을 식당가나 오토가르(버스터미널) 쪽으로 가려면 걸어서 갈 거리가 아니라는 것. 특히 밤에는 가로등이 거의 없는 구간이 있어서 걸어 내려가는 건 권하지 않는다. 호텔 셔틀 운행 여부와 시간은 체크인할 때 프런트에서 먼저 확인해두는 게 좋다. 요금·운행 시간은 시즌마다 달라지니 현장 확인 권장.
열기구가 뜨는 날, 호텔 마당이 곧 관람석이다
카파도키아 열기구는 바람과 기상 조건에 따라 당일 아침에 취소되는 일이 흔하다. 2월은 특히 그렇다. 그런데 뜨는 날에는 — 굳이 어디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 호텔 마당에서 바로 보인다.

새벽에 정원으로 나갔더니 하늘이 아직 짙은 파랑인데 열기구 한 대가 이미 떠 있었다. 왼쪽 능선 위로 검은 실루엣이 버너 불빛으로 아래쪽만 붉게 빛나고, 오른쪽 나무 뒤로는 커다란 열기구가 지면에서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능선 너머 멀리로도 여러 대가 점점이 올라오고 있었다. 정원 산책로 조명은 아직 켜져 있었고, 잔디에 나온 야외 테이블 위로 열기구가 지나갔다. 버너 소리가 바람 타고 "화악" 하고 건너오는데, 그 소리 때문에 거리가 실감났다.
탑승 예약을 안 했더라도 아쉬워할 필요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타면 열기구 안에서 밖을 보는 거고, 안 타면 열기구가 뜨는 풍경 전체를 보는 거다. 후자를 이 정도 자리에서 보는 것도 충분히 값진 경험이었다.
2월에 간다면 챙길 것
- 장갑과 얇은 목도리. 새벽 언덕 위는 낮 기온과 체감이 완전히 다르다.
- 밑창 있는 신발. 호텔 테라스 돌바닥과 언덕 지면 모두 서리가 녹으면 미끄럽다.
- 보온병 + 컵라면. 언덕에서 현장 조리가 정답. 방에서 미리 물 붓지 말 것.
- 보조배터리. 영하에서 휴대폰 배터리가 눈에 띄게 빨리 닳는다. 새벽 촬영 중에 한 번 꺼졌다.
수영장 못 쓰고, 마당 나무들은 다 앙상하고, 열기구는 뜰지 안 뜰지 매일 아침 복불복. 비수기의 단점을 다 적으면 이렇다. 그런데 텅 빈 테라스에서 계곡을 혼자 보고, 아무도 없는 언덕에서 신라면 블랙을 끓여 먹고, 정원에서 열기구 부푸는 걸 목격한 건 전부 2월이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다시 간다고 해도 나는 또 겨울을 고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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