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잘란 알로르, 붉은 식탁보 앞에서 네 시간을 앉아 있었다

부킷빈탕에서 골목 하나만 꺾으면 갑자기 도로가 통째로 식당이 되는 구간이 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여행자거리, 잘란 알로르(Jalan Alor)다. 나는 이 거리를 몇 번 왔는데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배가 고파서 왔는데, 정작 첫 30분은 아무것도 못 먹고 호객 사이에서 걸어만 다닌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오…

쿠알라룸푸르 · 여행자거리

부킷빈탕에서 골목 하나만 꺾으면 갑자기 도로가 통째로 식당이 되는 구간이 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여행자거리, 잘란 알로르(Jalan Alor)다. 나는 이 거리를 몇 번 왔는데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배가 고파서 왔는데, 정작 첫 30분은 아무것도 못 먹고 호객 사이에서 걸어만 다닌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오후 5시쯤 들어가 자리를 먼저 잡았다.

붉은 식탁보를 깐 노천 테이블 너머로 중국식 등이 줄지어 걸린 잘란 알로르 거리와 XIN LOONG SEAFOOD, MALA TANG JALAN 간판이 보이는 초저녁 풍경
해가 지기 전 자리를 잡으면 이 각도가 나온다. 정면에 'BAK KUT TEH' 입간판, 오른쪽으로 Xin Loong Seafood와 마라탕 간판.

사진 왼쪽 뒤로 낡은 아파트가 그대로 서 있는 게 이 거리의 정체다. 관광지처럼 정비된 곳이 아니라, 생활 건물 1층에 식당이 밀려 들어와 도로까지 테이블을 깔아버린 형태다. 그래서 머리 위엔 붉은 등이 걸려 있는데 바로 뒤엔 에어컨 실외기가 매달려 있다. 이 언밸런스가 싫으면 안 맞는 거리고, 이게 좋으면 몇 번이고 온다.

여행자거리 먹거리 — 뭘 시키고 뭘 피할까

잘란 알로르에서 제일 흔한 실패는 "간판 사진 보고 아무 데나 앉기"다. 여기 간판 사진은 거의 다 비슷하게 생겼고, 실제 나오는 접시와 크기 차이가 꽤 난다.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노점(꼬치·구이)에서 한두 개 집어 먹고, 앉아서 먹는 건 볶음 요리 위주로. 해산물 대형 접시는 값이 튀는 구간이라 가격표를 눈으로 확인하고 주문하는 편이 낫다.

Xin Loong Seafood Restaurant, ASIAN CHINESE AND THAI FOOD, RESTORAN FAT MAN DIM SUM 간판과 그 아래 딤섬 진열대, Grilled seafood 노점이 늘어선 잘란 알로르 거리
간판이 3층으로 겹쳐 있다. 아래쪽 'Grilled seafood 烤海鲜' 노점에 새우·오징어 꼬치가 쌓여 있고, 왼쪽은 Fat Man Dim Sum 진열대.

이 사진 한 장에 이 거리 먹거리의 지도가 다 들어 있다. 위쪽 노란 간판은 딤섬집(大包, 로마이까이, 차슈바오 등 사진 메뉴판이 그대로 붙어 있다), 가운데는 중식·태국식을 같이 하는 집, 아래는 구이 노점이다. 처음 온 사람이 놓치는 포인트는 딤섬 진열대다. 다들 저녁이니까 볶음·구이만 보는데, 저 찜통에서 하나씩 집어 먹는 게 배도 덜 부르고 값도 가볍다. 노점 꼬치는 대개 개당 계산이고, 큰 새우·가리비로 가면 단가가 확 올라간다. 계산 전에 몇 개 집었는지 스스로 세어 두면 마음이 편하다.

이날 시킨 것들

진한 갈색 소스가 묻은 굵은 면에 파와 고기가 섞인 호키엔 미가 흰 접시에 담겨 있고 붉은 식탁보 위에 놓인 모습
굵은 면에 검은 간장이 걸쭉하게 엉킨 호키엔 미(Hokkien Mee). 여기 오면 거의 무조건 시킨다.

굵은 면을 진한 흑간장에 볶아낸 호키엔 미. 사진에서 면 표면이 번들거리는 게 보이는데, 저 기름과 간장이 섞인 층이 이 음식의 전부다. 짜다고 느껴지면 맞게 나온 거다. 원래 밥이나 맥주랑 같이 먹는 구성이고, 이것만 단독으로 먹으면 후반에 물린다. 파와 돼지고기 조각, 그리고 바닥에 깔린 라드 조각이 씹히는데 기름진 걸 못 견디는 사람은 이 접시를 나눠 먹길 권한다. 나는 둘이서 하나 시켰고 그게 정답이었다.

바삭한 튀김면 위에 커리 버터 소스를 입힌 튀긴 조각과 튀긴 커리잎이 올라간 요리가 흰 접시에 담긴 모습
튀김면 위에 올린 버터·커리잎 튀김. 초록색은 튀긴 커리잎이다.

이게 개인적으로 이번 방문의 발견이었다. 바닥에 바삭한 튀김면을 깔고 그 위에 노란 버터 소스를 입힌 튀김을 올렸다. 사이사이 초록색이 튀긴 커리잎인데, 이걸 같이 씹어야 맛이 완성된다. 커리잎만 골라내고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그냥 단 튀김이 된다. 소스가 우유·버터 계열이라 처음엔 고소하다가 뒤로 갈수록 물리는 편이니 따뜻할 때 초반에 집중해서 먹는 게 좋다. 식으면 아래 튀김면이 소스를 먹어서 눅눅해진다. 이건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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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나는 갈색으로 구워진 닭날개 여러 개가 검은 접시에 담겨 있고 뒤로 노란 메뉴판과 붉은 식탁보가 보이는 모습
잘란 알로르의 상징 같은 구운 닭날개. 껍질이 얇게 카라멜라이즈됐다.

구운 닭날개는 이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품목이다. 사진처럼 껍질이 갈색으로 얇게 조여진 상태가 잘 구워진 것이고, 색이 시커멓게 타 있거나 반대로 허옇게 물기가 도는 건 대기 중에 미리 구워둔 것일 확률이 높다. 주문 후 몇 분 걸리는 집이 오히려 맞다. 즉시 나오면 재가열이라고 보면 된다. 간은 꿀·간장 계열로 달고, 살은 생각보다 촉촉했다. 손으로 뜯어 먹게 되니 물티슈를 챙기거나, 테이블에 놓인 티슈통(노란 플라스틱 케이스)을 쓰면 된다.

검붉은 소스에 잠긴 통삼겹 또는 갈비 덩어리가 흰 타원 접시에 놓여 있고, 뒤로 호키엔 미 그릇과 채소 절임, 커리 튀김 접시가 함께 놓인 식탁
진한 간장 소스에 통째로 잠긴 돼지고기 한 덩이. 뒤로 이날 시킨 다른 접시들이 함께 보인다.

이 접시가 이날 테이블에서 제일 무거웠다. 통으로 조리한 고기를 흑간장 소스에 통째로 담아 내는데, 사진에서 보이듯 소스가 접시 바닥에 고일 만큼 넉넉하다. 젓가락으로 눌러 자르면 결이 갈라진다. 맛은 확실히 좋았지만 이미 호키엔 미와 커리 튀김을 시킨 상태에서 이걸 추가한 건 과했다. 셋 다 간장·기름 계열이라 입이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문다. 뒤쪽 작은 그릇에 담긴 양배추·당근 절임이 그래서 고마웠다. 여기 오면 새콤한 것 하나는 꼭 끼워 넣으시라는 게 이날의 교훈이다. 채소 볶음이든 절임이든.

위치와 접근 —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잘란 알로르는 부킷빈탕 한복판에 있어서 접근이 쉽다. 모노레일 부킷빈탕 역에서 내려 사람 많은 쪽으로 걸으면 도보 5분 안팎이고, 파빌리온 쇼핑몰 쪽에서 걸어와도 비슷하다. 사진에서 저 멀리 보이는 'PAVILION' 글자가 붙은 고층 건물이 방향 기준점이 된다. 거리 자체는 차가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사실상 보행자 구역이 되는데, 시간대가 딱 정해져 있진 않아서 초저녁엔 차와 사람이 섞인다. 오토바이가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는 일도 흔하니 짐은 무릎 위나 의자 안쪽에 두는 게 낫다.

해질녘 붉은 등이 줄지어 걸린 잘란 알로르 거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고, 왼쪽에 24시간 KK 편의점 간판, 멀리 PAVILION 고층 빌딩이 보이는 풍경
해가 넘어가는 시각. 왼쪽 'KK BUKA 24 JAM'은 24시간 편의점, 그 옆으로 코리아 BBQ 간판도 보인다.

이 사진이 딱 이 거리의 피크 직전이다. 하늘은 아직 밝은데 등에는 불이 들어왔고, 천막 노점은 다 펼쳐졌다. 왼쪽 노점에 바나나가 매달려 있는 게 보이는데 과일·주스 파는 자리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시간대는 이 무렵이라고 본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사람이 더 밀려서 앉을 자리를 고를 수 없고, 사진도 조명 때문에 다 벌겋게 나온다. 반대로 너무 이르면 아직 문 안 연 집이 많다.

알아두면 덜 당황할 것들

어두워진 하늘에 붉고 푸른 조명을 켠 드론 수백 대가 모여 형상을 만들고 있고, 왼쪽에 고층 건물 외벽과 아래쪽에 타워크레인이 보이는 모습
이건 잘란 알로르 골목이 아니라, 밥 먹고 나와 큰길 쪽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드론 라이트쇼. 무슨 행사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밥을 다 먹고 거리를 빠져나오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을 보고 있었다. 드론 수백 대가 모여 뭔가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행사였는지, 정기적인 건지는 끝내 못 알아봤다. 공사 크레인과 유리 건물 사이로 그 불빛이 뜬 장면이 이상하게 이 도시 같았다. 낡은 아파트 1층에서 붉은 식탁보 깔고 닭날개를 뜯다가, 골목을 나오면 이런 게 떠 있다.

잘란 알로르는 "맛집 리스트를 들고 정복하는 곳"으로 접근하면 십중팔구 지친다. 간판 사진은 다 비슷하고, 사람은 계속 밀고, 호객은 안 끊긴다. 대신 앉을 자리를 하나 정하고 두세 접시만 신중하게 고르면 꽤 좋은 저녁이 된다. 다음에 오면 나는 튀김 하나, 볶음면 하나, 그리고 반드시 새콤한 채소 하나를 시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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