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낮의 반얀트리부터 밤의 KLCC 분수까지 — 하루를 통째로 쓴 기록

이번 쿠알라룸푸르 체류 중 딱 하루를 KLCC(Kuala Lumpur City Centre) 한 블록에 통째로 갈아넣었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건물이라 "사진 한 장 찍고 끝"으로 처리하기 쉬운데, 나는 오후에 걸어 들어가서 밤 분수쇼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동네는 낮…

쿠알라룸푸르 ·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이번 쿠알라룸푸르 체류 중 딱 하루를 KLCC(Kuala Lumpur City Centre) 한 블록에 통째로 갈아넣었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건물이라 "사진 한 장 찍고 끝"으로 처리하기 쉬운데, 나는 오후에 걸어 들어가서 밤 분수쇼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동네는 낮과 밤이 완전히 다른 장소다. 낮에는 그냥 더운 업무지구고, 해가 떨어지는 순간 도시 전체가 이 두 개의 첨탑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걸어 들어가는 길 — 잘란 암팡의 거대한 나무부터

택시로 정문 앞에 내리는 대신 잘란 암팡(Jalan Ampang) 쪽에서 걸어 들어갔는데, 그게 이날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브리티시 카운슬(British Council) 간판 옆 인도 한가운데에, 유리 커튼월 빌딩보다 존재감이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뿌리가 수백 가닥으로 내려와 기둥을 감싼 반얀 계열의 고목인데, 인도를 비켜 만들어 놓은 걸 보면 도시가 이 나무를 피해서 지어진 셈이다. 그늘 밑에 서니 체감 온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오후 2시 무렵의 KL은 습도가 몸에 달라붙는 수준이라, 이런 그늘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게 실제로 체력 문제가 된다.

잘란 암팡 인도에 서 있는 거대한 반얀나무. 수많은 공기뿌리가 기둥을 감싸고 있고 뒤로 유리 빌딩과 브리티시 카운슬 간판, 도로에 늘어선 차량이 보인다
트윈타워로 걸어가는 길목의 고목. 도로 쪽은 이미 정체 중이라 걸어온 게 빨랐다.

여기서 몇 분 더 걸으면 시야가 트이면서 두 탑이 통째로 들어온다. 낮에 보는 트윈타워는 은색이라기보다 흐린 하늘색에 가깝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로 마감된 파사드가 하늘빛을 그대로 받아버려서, 구름 낀 날에는 건물이 배경에 살짝 녹는다. 41·42층을 잇는 스카이브릿지가 두 탑 사이에 정확히 걸려 있고, 그 아래를 V자 지지대가 받치고 있는 구조가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보인다.

흐린 낮 하늘 아래 올려다본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두 동과 41층 스카이브릿지, 아래쪽 도로에는 초록색 관광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낮의 트윈타워. 사진 아래 초록 버스처럼 관광버스가 수시로 서기 때문에 전신샷은 도로 건너편이 낫다.

건설 당시 이야기 — 두 탑을 나눠서 지었고, 하나가 기울었다

이 건물을 그냥 "높은 쌍둥이 빌딩"으로만 보면 재미가 없다. 알고 보면 이 탑은 서로 경쟁시키려고 나눠서 지은 건물이다. 타워1은 일본 하자마 건설, 타워2는 한국의 삼성물산·극동건설 컨소시엄이 맡았다. 두 팀이 각각 한 동씩 올렸고, 한국 팀은 착공이 한 달 이상 늦었는데도 먼저 꼭대기에 도달했다는 이야기가 업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한국 사람으로서 이 탑 아래에 서면 아무래도 오른쪽 탑(타워2)에 눈이 한 번 더 간다.

더 인상적인 건 기초 공사다. 원래 부지의 암반 상태가 나빠서 건물 위치를 통째로 60m가량 옮겼고, 결국 암반까지 닿는 대신 100m 넘게 파고들어간 배러트 파일(barrette pile) 위에 얹었다. 그런데 시공 중 타워 하나가 수직에서 미세하게 벗어난 게 발견돼,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보정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452m짜리 건물에서 몇 cm 단위를 잡아가며 쌓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탑을 잇는 스카이브릿지는 양쪽에 고정돼 있지 않다 — 바람과 열에 따라 건물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 다리도 같이 미끄러지며 움직이도록 설계돼 있다. 아래에서 V자 다리와 브릿지 접합부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저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얹혀 있는' 구조라는 게 새삼 이상하게 느껴진다.

외관의 8각 별 모양 평면은 이슬람 기하학 문양(루브 엘 히즈브)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실루엣이 같은 대칭을 유지한다. 밤에 조명이 들어오면 이 층층의 요철이 전부 그림자를 만들어서, 낮보다 밤에 훨씬 더 '조각'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접근성은 KL에서 손에 꼽게 편하다. LRT 켈라나자야 라인 KLCC역이 수리아 KLCC 지하로 바로 연결되고, 부킷빈탕 쪽에서는 파빌리온에서 이어지는 에어컨 스카이워크로 걸어올 수 있다. 도보로 대략 10~15분인데, 이 도시에서 '실내로 계속 걸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장점이다. 반대로 그랩(Grab)은 저녁 시간대에 픽업 지점 찾다가 시간을 더 까먹는 경우가 많았다. 퇴근 시간에 잘란 암팡은 진짜로 안 움직인다.

수리아 KLCC — 사람 밀도가 곧 볼거리인 몰

타워 발치에 붙어 있는 수리아 KLCC(Suria KLCC)는 지하부터 6층까지 이어지는 쇼핑몰인데, 여기 들어가면 KL이 왜 동남아 쇼핑 허브라 불리는지 바로 이해된다. 중앙 아트리움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층층이 난간에 사람이 붙어 있고, 그 아래 1층 광장 전체를 샤넬이 통째로 빌려 팝업 부스를 세워놨다. 카멜리아 꽃무늬를 두른 흰 큐브들, 코코 마드모아젤과 N°5 대형 스크린, 그 옆으로 디올·아르마니·롱샴 매장이 줄줄이 이어진다. 바로 옆에는 유니클로 간판이 같이 붙어 있는데, 이 조합이 오히려 이 몰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명품과 SPA가 같은 층에서 아무렇지 않게 붙어 있고, 손님도 그렇게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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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아 KLCC 몰 아트리움을 위층에서 내려다본 모습. 샤넬 카멜리아 팝업 부스와 코코 마드모아젤·N5 대형 광고, 디올과 롱샴 매장, 난간에 늘어선 사람들이 보인다
1층 광장을 통째로 쓴 샤넬 팝업. 난간마다 사람이 붙어 있어 아래층 이동이 은근히 느리다.

층을 하나 더 올라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규모가 더 실감난다. 아트리움을 가로지르는 초대형 세로형 LED 스크린에 'SURIA KLCC' 로고와 함께 KLCC 분수쇼 앞에서 커플이 마주 보는 광고 영상이 반복 재생된다. 몰 안에서 밤의 분수쇼 광고를 보고, 몇 시간 뒤에 실제로 그 분수 앞에 서 있게 되는 구조다. 마케팅이 참 얄밉게 잘 짜여 있다.

수리아 KLCC 아트리움의 초대형 세로형 LED 스크린에 KLCC 분수쇼 광고 영상이 나오고, 아래층에는 샤넬 팝업 부스와 이동하는 쇼핑객들이 내려다보인다
몰 한가운데를 가르는 세로형 스크린. 여기서 본 분수쇼 영상이 그날 밤 실물로 이어졌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TGV 시네마스 입구의 붉은 LED 사인이 천장까지 물들이고, 그 아래엔 미니언즈 굿즈 부스와 풍선이 늘어서 있다. 명품 층에서 두 층만 올라왔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나라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층이 제일 편했다. 명품 층은 예쁘긴 한데 오래 서 있으면 어깨가 굳는다.

수리아 KLCC 상층부 TGV CINEMAS 입구의 붉은 LED 간판. 아래쪽에 메시가 나오는 광고 스탠드와 미니언즈 굿즈 부스, 풍선이 보인다
TGV 시네마스 입구. 명품 층 바로 위인데 공기가 완전히 다르다.

제우스 커피(ZUS Coffee) — CEO 라떼 한 잔이 이날의 반전

몰을 걷다 지쳐서 들어간 곳이 ZUS COFFEE(제우스 커피)였다. 파란 원 안에 수염 난 제우스 얼굴이 그려진 그 로고, KL 시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친다. 말레이시아 로컬 브랜드인데 지금은 사실상 이 나라 카페 시장을 장악한 체인이다. 이 지점은 페라나칸풍 나무 창살과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 차양을 두른 키오스크 형태로, 몰 통로 한가운데에 섬처럼 떠 있다. 카운터 옆 문구가 눈에 걸렸다 — "...a Necessity, not a Luxury". 커피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품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가격 정책이 딱 그렇다. 한국 프랜차이즈 기준으로 보면 놀랄 만큼 싸고, 그러면서 맛이 밀리지 않는다.

수리아 KLCC 몰 통로에 있는 ZUS COFFEE 매장. 파란 제우스 얼굴 로고 사인과 페라나칸풍 나무 창살, 스테인드글라스 차양 아래로 주문하는 손님들이 줄 서 있다
몰 안의 ZUS Coffee 키오스크. QR 스캔 주문이 기본이고, 대기 줄은 늘 이 정도.

여기서 시킨 게 CEO 라떼(ZUS 시그니처 라인)다. 이름만 보고 그냥 라떼겠거니 했는데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첫 모금이 달다. 그런데 시럽으로 억지로 단 게 아니라, 캐러멜과 볶은 곡물 사이 어딘가의 단맛이 우유 지방에 실려서 목구멍 안쪽까지 부드럽게 밀려 들어온다. 뒤끝에 에스프레소의 쌉쌀함이 딱 한 겹 남아서 물리지 않는다. 몰을 두 시간 넘게 걸어다녀 당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이 한 잔이 그 구멍을 정확히 메웠다. 컵을 잡았을 때 파란 슬리브가 손에 닿는 감촉, 뚜껑 열 때 훅 올라오던 단내까지 아직 기억난다. 옆 사람도 같은 걸 시켜서 둘이 나란히 뚜껑을 열고 있었다.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놓인 ZUS Coffee 파란 컵. 흰 뚜껑과 제우스 얼굴 로고 슬리브가 보이고, 뒤쪽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컵의 뚜껑을 열고 있다
ZUS의 CEO 라떼. 달지만 텁텁하지 않은 게 핵심이다.

솔직한 아쉬움도 하나. 이 지점은 앉을 자리가 거의 없다. 키오스크형이라 카운터 옆 스툴 몇 개가 전부고, 사람 지나다니는 통로 한복판이라 앉아도 계속 어깨가 스친다. 커피 마시며 쉬려던 계획은 접고 컵 들고 걸었다. 그리고 주문은 벽에 붙은 QR로 하는 게 기본이라, 카운터에서 말로 시키려다 한 박자 버벅였다. 미리 QR을 찍어두면 훨씬 빠르다. 가격은 프로모션이 자주 바뀌니 현장 메뉴판 확인을 권한다.

밤의 KLCC — 이 동네의 진짜 얼굴

해가 지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 낮에 밋밋했던 그 은색 건물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다. 몰 옥상 정원 쪽에서 야자수 잎 사이로 올려다본 트윈타워는, 층마다 박힌 조명이 8각 별 평면의 요철을 하나하나 긁어내서 탑 전체가 금속 레이스처럼 빛난다. 스카이브릿지의 V자 지지대에도 조명이 들어와서, 두 탑 사이 허공에 삼각형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습기 때문에 빛이 살짝 번지는데, 그게 오히려 더 좋았다. 목이 아플 때까지 올려다봤다.

밤에 조명이 켜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야자수 잎 사이로 올려다본 모습. 스카이브릿지와 V자 지지대에도 불이 들어와 있고 아래로 수리아 KLCC 건물 창들이 보인다
야경의 트윈타워. 야자수를 프레임에 걸면 밋밋한 야경샷이 살아난다.

그리고 KLCC 공원의 심포니 레이크 분수쇼. 물줄기가 10m 넘게 솟구치고 조명이 보라·핑크·시안으로 바뀌는데, 물줄기 사이로 'KLCC — Kuala Lumpur City Centre' 사인이 붉은 핀 아이콘과 함께 떠오른다. 그 뒤로는 주변 콘도의 노란 창불이 배경을 채운다. 인공적인 화려함이 극단까지 간 풍경인데, 이상하게 촌스럽지 않다. 물이 떨어질 때 바람 타고 미세한 물방울이 얼굴에 닿는데, 하루 종일 더위에 절어 있던 입장에서는 그 순간이 제일 좋았다.

밤의 KLCC 심포니 레이크 분수쇼. 보라와 파랑 조명을 받은 물줄기가 높이 솟구치고 그 사이로 붉은 핀 아이콘이 달린 KLCC 사인과 주변 고층 건물의 불빛이 보인다
심포니 레이크 분수쇼. 물줄기 사이로 KLCC 사인이 드러나는 타이밍이 하이라이트다.

가보고 나서 정리한 실전 메모

트윈타워는 "유명해서 가보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하루를 통째로 써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한국 건설사가 한 동을 올렸고, 기초가 흔들려 통째로 위치를 옮겼고, 다리 하나가 건물의 흔들림을 흡수하며 얹혀 있는 건물. 그 아래에서 커피 한 잔 들고 분수 앞에 서 있다 보면, 이 도시가 이 두 개의 탑을 중심으로 자기 얼굴을 만들었다는 게 꽤 명확하게 느껴진다. 다음에 KL에 오면 이번엔 스카이브릿지에 올라가서 반대로 아래를 내려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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