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바투 동굴(Batu Caves) — 272계단은 생각보다 좁고, 동굴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쪽 곰박(Gombak) 쪽으로 올라가면 석회암 덩어리 하나가 통째로 서 있고, 그 배를 파고 들어간 자리에 힌두 사원이 있다. 바투 동굴이다. 이날 아침에도 한 차례 비가 지나간 뒤라 광장 타일이 번들거렸고, 도착하자마자 발밑에서 물기가 밟혔다. 오후 늦게 숙소로 돌아와 젖은 신발을 말리면서, 오…
쿠알라룸푸르 · 바투 동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쪽 곰박(Gombak) 쪽으로 올라가면 석회암 덩어리 하나가 통째로 서 있고, 그 배를 파고 들어간 자리에 힌두 사원이 있다. 바투 동굴이다. 이날 아침에도 한 차례 비가 지나간 뒤라 광장 타일이 번들거렸고, 도착하자마자 발밑에서 물기가 밟혔다. 오후 늦게 숙소로 돌아와 젖은 신발을 말리면서, 오늘 본 것들을 잊기 전에 적어둔다.

입구 광장에 서면 첫인상이 '사원'이 아니라 '새떼'다. 누가 모이를 뿌렸는지 비둘기가 바닥을 덮고, 사람이 지나가면 한꺼번에 솟구쳐 머리 위를 돈다. 날갯소리가 생각보다 크고, 깃털 냄새 비슷한 것이 섞인 눅눅한 공기가 있다.


절벽이 먼저, 사원은 그다음
여기 처음 오는 사람은 대개 황금색 무루간 상과 무지개 계단만 찍고 내려간다. 그런데 고개를 들면 그 뒤에 400미터급 석회암 카르스트가 통째로 서 있다. 사원 지붕 위로 절벽이 겹겹이 물러나는 구도가 이 장소에서 제일 좋은 장면 중 하나인데, 정작 사람들은 계단만 보고 지나간다.




황금 무루간 상 앞 광장
계단 오른쪽에 서 있는 황금색 무루간(Murugan) 상은 42.7m로 알려져 있다. 숫자만 들으면 감이 안 오는데, 실물 앞에 서면 목이 아플 정도로 젖혀야 얼굴이 보인다. 표면이 매끈한 도금이 아니라 잘게 돌기가 잡힌 질감이라, 흐린 날에도 은근히 빛을 문다.



위치·접근성 — KTM 종점이라 편하다
쿠알라룸푸르 시내(KL 센트럴)에서 KTM 코뮤터 바투 케이브스(Batu Caves) 노선을 타면 종점에서 내린다. 종점이라 지나칠 걱정이 없고, 역에서 광장까지는 도보 몇 분 거리다. 요금과 배차는 시기별로 바뀌므로 현장 또는 KTM 앱에서 확인하는 게 안전하다. Grab을 쓴다면 광장 오른편에 'PICK-UP & DROP-OFF AREA / Grab' 표지가 따로 서 있으니 그쪽에서 잡으면 된다. 대형 버스와 밴이 줄지어 서는 주차장도 광장 바로 옆이라, 단체 관광객이 쏟아지는 시간대와 겹치면 계단이 정체된다.
원숭이와 비둘기, 그리고 바닥 상태 — 슬리퍼는 신지 마라
이 글에서 제일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이다. 광장부터 계단 꼭대기까지 원숭이가 곳곳에 돌아다닌다. 주차장 타일 위에서 누가 버린 망고를 뜯어먹고 있고, 그 옆에 비둘기가 붙어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비닐봉지를 들고 있으면 먹을 것으로 인식하니, 손에 든 물건은 가방 안에 넣는 게 낫다.




이 사진들이 과장이 아니다. 비가 잦은 지역이라 계단과 광장이 늘 젖어 있고, 여기에 원숭이·비둘기 오물이 섞여 바닥이 생각보다 지저분하다. 물기 위에 그 오물이 얇게 퍼지면 미끄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슬리퍼·샌들은 정말 비추천이다. 발등이 훤히 열린 신발로 272계단을 오르내리면, 밟는 것도 튀는 것도 다 몸으로 받는다. 밑창이 잡히는 운동화가 답이다. 참고로 계단 입구 쪽에는 'NO SHOES' 표시가 있는 구역이 따로 있으니, 신발을 벗어야 하는 성소 구역인지 아닌지는 표지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

272계단 — 좁고, 가파르고, 마주 오는 사람이 많다
계단이 엄청 많고 좁다. 무지개색으로 칠해놔서 사진으로는 예쁘지만, 실제로 밟아보면 폭이 좁은 편이고 단이 높다. 위로 갈수록 경사가 더 서고, 중앙 통로는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뒤엉킨다. 나는 중간쯤에서 내려오던 단체와 겹쳐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난간은 양쪽에 스테인리스 봉으로 잡을 데가 있으니 특히 내려올 때는 반드시 난간을 잡는 게 좋다. 젖은 계단에서 발이 한 번 밀리면 붙잡을 게 없다.





올라가면 경치가 볼 만하다
숨이 차서 후회할 때쯤 뒤를 돌아보면, 그게 보상이다. 계단 위에서 남쪽을 보면 쿠알라룸푸르 시가지가 흐릿하게 펼쳐지고, 바로 아래로는 광장과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주차장에 세워둔 관광버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무루간 상의 뒷모습과 시내가 겹치는 구도는 아래에서는 절대 못 찍는 그림이다.



동굴이 엄청 거대하다 — 이게 진짜 본편
계단을 다 올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리가 바뀐다. 밖의 새소리와 차 소리가 끊기고 발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동굴이 정말 거대하다. 천장까지 수십 미터는 되고, 종유석이 커튼처럼 늘어져 있으며, 그 아래 사원과 매점,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인다. 사진으로는 이 규모가 잘 안 담긴다 — 이건 직접 목을 젖혀봐야 안다.








동굴 안에 또 계단이 있고, 곳곳에 앉을 자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착각한다. 272계단이 끝인 줄 알고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데, 동굴 안쪽에 또 계단이 있고 거기서 한 번 더 올라가는 길이 있다. 그 계단 역시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고, 끝까지 오르면 천장이 열린 안쪽 공간과 또 다른 사당이 나온다. 다행히 중간중간 벤치와 앉을 만한 단이 있어 쉬어갈 수 있다. 나도 두 번 앉았다. 습도가 높아 땀이 안 마르는 곳이라, 무리해서 한 번에 올라가는 것보다 앉아서 숨을 고르고 가는 편이 훨씬 낫다.



내려와서 — 청록색 하누만도 놓치지 말 것
계단을 다 내려오면 대부분 그대로 역으로 향하는데, 광장 남쪽 끝에 청록색 하누만 상이 따로 서 있다. 그 뒤가 라마야나 동굴(Ramayana Cave) 쪽이다. 메인 동굴과 달리 이쪽은 별도 입장료를 받는 구간이 있으니, 시간과 다리 상태를 보고 결정하면 된다. 요금은 시기에 따라 달라지므로 매표소에서 확인하는 게 정확하다.

정리해두는 실전 메모
- 신발: 밑창이 잡히는 운동화. 슬리퍼·샌들은 젖은 계단과 오물 때문에 정말 비추천.
- 복장: 사원 구역이라 무릎이 드러나는 하의는 입구에서 사롱을 대여해 두르게 하는 경우가 있다. 긴 바지나 긴 치마가 마음 편하다.
- 소지품: 비닐봉지·음료·과자를 손에 들고 다니지 말 것. 원숭이가 정확히 그걸 노린다.
- 시간대: 오전이 그나마 덜 붐빈다. 단체 버스가 들어오면 계단이 병목이 된다.
- 날씨: 스콜이 잦다. 우산이나 얇은 우비 하나면 계단에서 발이 묶이지 않는다.
- 체력 배분: 272계단이 끝이 아니다. 동굴 안 계단까지 계산하고 올라가자. 중간 벤치를 적극적으로 쓰는 게 낫다.
- 비용: 메인 동굴(템플 케이브) 자체는 무료로 알려져 있고, 라마야나 동굴 등 일부 구간은 별도 요금. 금액은 현장 확인 권장.
솔직한 아쉬움도 적어둔다. 젖은 바닥과 배설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쓰레기 때문에 '성스러운 공간'을 기대하고 오면 첫인상이 깨질 수 있다. 사람도 많아서 조용히 둘러보긴 어렵다. 그래도 계단 끝에서 동굴 천장을 올려다본 몇 초는, 그 모든 걸 감수할 만했다. 다음에 온다면 비 그친 직후 말고 아침 일찍, 운동화 신고 다시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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