믈라카 강 위 Tan Kim Seng 다리에서 반나절 — 유네스코 유산 도시의 '작은 베네치아'를 걸어봤다

말레이시아 믈라카(Melaka)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페낭 조지타운과 묶여 '말라카 해협의 역사도시'로 등재됐는데, 실제로 걸어보면 왜 그렇게 됐는지 몸으로 이해된다. 도시 한가운데를 믈라카 강이 가르고, 그 양쪽 강변에 낮은 숍하우스와 상가가 줄줄이 붙어 있다. 베네치아라고 하면 과장이지만,…

믈라카 · Jambatan Tan Kim Seng

말레이시아 믈라카(Melaka)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페낭 조지타운과 묶여 '말라카 해협의 역사도시'로 등재됐는데, 실제로 걸어보면 왜 그렇게 됐는지 몸으로 이해된다. 도시 한가운데를 믈라카 강이 가르고, 그 양쪽 강변에 낮은 숍하우스와 상가가 줄줄이 붙어 있다. 베네치아라고 하면 과장이지만, 물길을 가운데 두고 양안이 마주 보며 장사하는 구조는 확실히 닮았다. 내가 오래 서 있었던 곳은 Jambatan Tan Kim Seng, 강 위에 놓인 다리다. 여기 난간에 팔을 얹으면 강 양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Tan Kim Seng 다리 위에서 본 믈라카 강. 흙탕물 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엔 하드록카페와 벽화가 그려진 숍하우스, 오른쪽엔 노천 파라솔이 늘어선 상가가 마주 보고 있다
다리 위에서 본 강 상류 방향. 왼쪽은 하드록카페와 컬러 벽화 골목, 오른쪽은 파라솔 깔린 강변 식당가.

사진에서 보이듯 물빛은 커피에 우유 탄 색이다. 처음 온 사람들이 "왜 이렇게 흙탕물이냐"고 하는데, 이 강은 바다와 이어져 있어 조수 영향을 받는다. 내가 간 날은 물이 많이 빠져서 양쪽 석벽 아래로 갯벌과 굴 껍데기 붙은 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냄새도 살짝 올라온다. 갯벌 특유의 비릿한 냄새인데, 견딜 만한 수준이지만 사진으로 상상한 '낭만적 수로'와는 다르다는 건 미리 알고 가면 좋다.

물이 빠져 갯벌과 자갈이 드러난 믈라카 강. 저 멀리 다리에 'Melaka 2026' 이라 적힌 컬러 현수막이 걸려 있고 오른쪽 강변엔 하드록카페 건물이 보인다
간조 때 드러난 강바닥. 멀리 다리에 'Melaka 2026'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강물을 들여다보다 만난 것 — 도마뱀

다리 난간에서 한참 강을 내려다보는데 물살 사이로 뭔가 길쭉한 게 헤엄쳐 갔다. 처음엔 나뭇가지인 줄 알았는데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아가는 게 분명했다. 물왕도마뱀(모니터 리자드)이다. 강변 상가 간판 바로 아래, 사람들 발밑 몇 미터 지점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늘어선 관광지 한복판인데도 이 강은 여전히 야생이 사는 물길이라는 게 실감났다. 강 옆을 걸을 때 물가 쪽으로 발을 내밀지 않는 게 좋다.

강변 간판 아래 흙탕물 속을 헤엄치는 물왕도마뱀. 왼쪽 위에 보라색 숫자 6 간판이 걸려 있다
간판 바로 아래를 헤엄쳐 지나간 물왕도마뱀. 크기가 꽤 컸다.

양산 없이는 못 버틴다 — 그리고 이 더위에 탈을 쓴 사람

솔직히 말하면, 이 동네에서 제일 중요한 준비물은 지도도 현금도 아니고 양산이다. 낮 시간대에 그늘 없는 광장을 가로지르면 정수리가 따갑다. 습도까지 높아서 10분만 걸어도 셔츠가 등에 붙는다. 현지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우산을 양산으로 쓴다. 아래 분수 사진에도 검은 우산을 펴 든 사람이 그대로 찍혔다. 관광객 티 안 내려고 참지 말고, 그냥 우산 하나 챙겨 가는 게 낫다. 나는 첫날 이걸 안 챙겼다가 오후에 두통이 와서 카페로 도망쳤다.

붉은 스타다이스 건물 앞 빅토리아 분수. 오른쪽에 검은 양산을 펴 든 여성이 서 있고 왼쪽에서는 관광객이 쪼그려 앉아 분수를 촬영하고 있다
빅토리아 분수와 붉은 스타다이스. 오른쪽 검은 양산이 이 도시의 표준 장비다.

그런데 이 더위에 전신 탈을 쓰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분수 옆 화단 앞, 분홍색 털 인형탈.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 모양인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덮는 옷이다. 체감 35도가 넘는 대낮에 저걸 입고 서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지나가던 여자아이가 손을 잡아끌며 그쪽으로 가려 하고, 어른들은 그 앞에서 양산을 펴 든 채 구경한다. 보고 있자니 시원한 커피 한 잔이라도 사다 주고 싶었다. 사진 촬영 후 팁을 주는 게 관례이니, 찍었다면 지폐 몇 링깃 정도는 건네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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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건물 앞 광장에서 분홍색 토끼 인형탈을 쓴 사람이 서 있고, 앞쪽에서 여자아이가 어른의 손을 잡고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 뒤쪽 상점가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보인다
한낮 뙤약볕 아래 분홍 인형탈. 뒤편 상점가에도 우산 행렬이 이어진다.

다리 건너 붉은 광장 — 네덜란드 광장 일대

Tan Kim Seng 다리에서 강을 건너 조금만 걸으면 바로 붉은 건물 무리가 나온다. 믈라카 관광 사진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크라이스트 처치 믈라카(Christ Church Melaka)다. 정면 박공에 'CHRIST CHURCH MELAKA 1753'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 왼쪽으로 'AD 1931' 표기가 있는 믈라카 미술관(Balai Senilukis Melaka)이 붙어 있다. 18세기 네덜란드 시절 교회와 20세기 건물이 같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교회 앞 광장에는 트라이쇼(자전거 인력거)가 줄지어 대기한다. 헬로키티, 미니언즈 같은 캐릭터 인형과 조화로 뒤덮여 있고 밤에는 LED까지 켜진다. 취향은 갈리는데, 나는 처음 봤을 때 좀 당황했다. 유네스코 유산 도시의 18세기 교회 앞에 형광 분홍 키티 인력거가 서 있는 조합이 그렇다. 그래도 이게 지금 믈라카의 실제 모습이다.

붉은색 크라이스트 처치 믈라카 정면과 그 왼쪽 AD 1931 표기가 있는 믈라카 미술관 건물. 앞 광장에는 분홍색 인형으로 장식한 트라이쇼들이 줄지어 서 있다
크라이스트 처치 믈라카(1753)와 믈라카 미술관(AD 1931), 그리고 캐릭터 트라이쇼.

같은 광장에 붉은 시계탑도 서 있다. 탑 옆 회랑에 'STADTHUYS'라고 크게 적혀 있어 위치를 찾기 쉽다. 시계탑 자체는 몇 분이면 다 보지만, 이 앞이 사실상 구시가 걷기의 기준점이다. 여기서 강 쪽으로 내려가면 다리, 반대로 언덕을 오르면 세인트폴 교회 방향이다.

붉은 벽돌색 시계탑과 그 왼쪽 STADTHUYS 글자가 적힌 회랑. 바닥은 주황 격자 타일이고 뒤로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
붉은 시계탑과 스타다이스. 구시가 걷기의 출발점으로 삼기 좋다.

강변 골목의 벽화, 그리고 배 타는 자리

강 서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붉게 칠한 숍하우스 벽면에 큼직한 벽화가 있다. 말레이 전통 복장을 한 두 인물이 격투하는 장면이고, 옆에 "...bijak Laksana Tuah / ...berani Laksana Jebat"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말레이 고전 설화의 항 투아와 항 제밧을 가리키는 문구다. 벽이 깨져 그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그린 트롱프뢰유 기법이라 실제로 보면 입체감이 상당하다. 골목 위로는 전구 줄이 걸려 있고 붉은 차양이 드리워져 있어, 정면으로 찍으려면 차양 그림자를 피해 몇 걸음 물러서야 한다.

붉은 숍하우스 벽에 그려진 대형 벽화. 말레이 전통 의상을 입은 두 인물이 겨루는 장면이며 왼쪽에 Laksana Tuah, Laksana Jebat 문구가 적혀 있다. 아래로 행인 두 명이 지나간다
항 투아와 항 제밧을 그린 벽화. 벽이 뚫린 듯한 착시 기법이다.

강 건너편에는 리버크루즈 선착장인 'JETI STADTHUYS'가 있다. 진분홍 간판에 Selamat Datang(환영합니다)이라고 적혀 있고, 태양광 패널이 붙은 파란 지붕 아래 스테인리스 벤치가 놓여 있다. 그늘이 얕아 대기 중엔 별 도움이 안 된다. 선착장 뒤로 보이는 흰색·벽돌 2층 건물은 정화 연구원(鄭和研究院, Akademi Pengajian Cheng Ho Antarabangsa)이다. 남색 문양 아치가 늘어선 정면이 눈에 띈다. 요금과 운항 시간은 시즌마다 바뀌니 현장 매표소에서 확인하는 게 확실하다.

파란 지붕과 진분홍 JETI STADTHUYS 간판이 걸린 리버크루즈 선착장. 강 건너편에는 정화 연구원이라 적힌 벽돌 2층 건물과 흰 양산을 쓴 사람들이 보인다
JETI STADTHUYS 선착장. 건너편 벽돌 건물이 정화 연구원(鄭和研究院).

다녀와서 정리한 실용 메모

돌아오는 길에 다시 다리에 섰다. 물은 여전히 탁했고, 강 양쪽 상가에는 조명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유네스코 유산이라는 타이틀보다 기억에 남은 건 갯벌 냄새, 정수리를 때리던 햇볕, 그리고 그 아래서 분홍 털옷을 입고 서 있던 사람이었다. 다음에 오면 만조 시간에 맞춰 다시 이 자리에 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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