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티안 여행자거리에서 사흘: 전선 뭉치 아래서 밥 먹고 술 마신 기록

라오스 비엔티안의 여행자거리는 지도상으로는 남푸 분수 광장에서 메콩강 쪽으로 내려가는 몇 블록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좁은 구역 안에 게스트하우스, 일식 이자카야, 프랑스식 와인숍, 노점 국수집, 정부 청사, 사원, 중국 사당이 전부 들어차 있다. 나는 이 동네를 낮에 두 번, 밤에 두 번 걸었는데 같은 길인지 매번 헷갈…

비엔티안 · 여행자 거리

라오스 비엔티안의 여행자거리는 지도상으로는 남푸 분수 광장에서 메콩강 쪽으로 내려가는 몇 블록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좁은 구역 안에 게스트하우스, 일식 이자카야, 프랑스식 와인숍, 노점 국수집, 정부 청사, 사원, 중국 사당이 전부 들어차 있다. 나는 이 동네를 낮에 두 번, 밤에 두 번 걸었는데 같은 길인지 매번 헷갈렸다. 낮에는 그냥 나른한 지방 소도시 같고, 해가 지면 전구 줄이 켜지면서 완전히 다른 거리가 된다.

비 온 뒤 젖은 여행자거리 골목, 흰색 승합차가 줄지어 주차되어 있고 오른쪽에 샌드위치·버거 간판과 라오스 국기가 걸린 건물이 늘어선 모습
비 갠 오후의 여행자거리. 왼쪽은 주차 구역, 오른쪽 인도로 사람이 다닌다. 거리 끝에 초록 지붕 문이 보인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 — 전선 뭉치

이 동네에서 처음 온 사람이 제일 먼저 사진을 찍는 건 음식도 사원도 아니고 전봇대다. 나도 그랬다. 라오국립문화회관(Lao National Culture Hall)과 남푸(Nam Phu) 방향 표지판이 붙은 전봇대 하나에 케이블이 수백 가닥 감겨 있는데, 위쪽은 이미 검은 덩어리가 되어 새 둥지처럼 뭉쳐 있다. 전력선, 통신선, 인터넷선이 수십 년치 쌓인 결과다.

파란 하늘 아래 수백 가닥 케이블이 검은 덩어리처럼 뭉친 전봇대와 라오국립문화회관·남푸 방향 초록 표지판, 뒤쪽 민트색 DA DA INN 건물
전봇대 하나에 몰린 케이블. 아래 표지판은 라오국립문화회관과 남푸 방향, 오른쪽 건물은 DA DA INN.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저거 위험한 거 아닌가"였다. 비 오는 날 저 밑을 지나가는 게 찜찜했다. 그런데 현지에서 들은 얘기는 반대였다. 저 엉킨 전선 자체가 유명해져서, 일부러 그걸 보러 오는 여행자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봇대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각도를 재는 서양인 배낭객을 두 번 봤다. 흉물이 관광 자원이 된 셈인데, 웃기면서도 묘하게 납득이 갔다. 비엔티안에서 가장 '비엔티안스러운' 풍경이 맞긴 하다.

노란색 MIXOK INN 건물 앞 사거리, 거대한 전선 뭉치 전봇대에 파란 고소작업차 바스켓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작업자들, 앞으로 지나가는 스쿠터
노란 MIXOK INN 앞 사거리. 고소작업차와 사다리를 동시에 올려 전선 뭉치를 손보는 중이었다.

다만 방치되어 있는 건 아니다. 이틀 동안 같은 자리에서 작업 장면을 두 번 봤다. MIXOK INN 앞 사거리에서는 파란 고소작업차 바스켓과 나무 사다리를 동시에 걸어놓고 인부 서너 명이 뭉치 속을 뒤지고 있었고, 하드록 카페(Hard Rock Cafe) 간판이 보이는 큰길 쪽에서도 가로등에 사다리를 대고 작업 중이었다. 안전벨트 없이 사다리 위에 서 있는 걸 보고는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사진 찍겠다고 사다리 밑으로 지나가지는 말자.

하드록 카페 간판이 보이는 큰길에서 사다리를 타고 가로등과 전선을 손보는 작업자, 앞에는 툭툭과 흰색 트럭, 도로에는 GENERAL TRAFFIC 차선 표시
하드록 카페 앞 큰길. 바닥의 'GENERAL TRAFFIC' 표시는 버스 전용 차선과 일반 차선을 나눈 것.

낮의 여행자거리는 생각보다 조용하다

오전 열 시에서 오후 두 시 사이는 거의 비어 있다. 상점 문은 열려 있는데 손님이 없고, 툭툭 기사들은 그늘에 세워둔 차 안에서 잔다. 하늘은 뻔뻔할 정도로 파랗고, 그 파란 하늘을 전선이 사선으로 가른다. 이 각도로 사진 찍으면 전선이 오히려 구도를 잡아줘서 좋다. 멀리 사원의 금색 지붕이 지붕선 위로 살짝 올라온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가로지르는 전선들, 양쪽에 주차된 토요타 픽업트럭과 저층 상가, 멀리 금색 사원 지붕이 보이는 낮의 거리
한낮의 골목. 오른쪽에 Pimenton 간판, 길 끝 왼쪽으로 금색 사원 지붕이 걸린다.

여행자거리에서 한 블록만 큰길로 나오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MANGO 매장과 공사 중인 골조 건물이 나란히 서 있고, 맞은편에는 시세이도 광고가 건물 한 면을 통째로 덮은 'Beauty Avenue'가 있다. 라오스 국기와 붉은 등, 6층짜리 화장품 광고가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게 지금 비엔티안의 속도 같았다.

왼쪽에 MANGO 매장과 공사 중인 콘크리트 골조, 오른쪽에 시세이도 광고가 걸린 붉은 Beauty Avenue 건물이 마주 보는 넓은 도로
MANGO 매장 건너편의 Beauty Avenue. 그 옆은 Yunnar Music 간판.

은행과 환전소도 이 근처에 몰려 있다. 폰사반 은행(Phongsavanh Bank) 삼센타이 지점 앞을 지나다가 낡은 군용 지프가 세워진 걸 봤다. 창구 유리에는 SWIFT 송금 수수료를 $0, $10으로 크게 써 붙인 광고가 붙어 있었고, 그 앞에 저 지프가 서 있으니 시대가 두 겹으로 겹쳐 보였다. 환율은 은행과 사설 환전소가 다르니 큰 금액이면 두어 군데 비교해보는 게 낫다(고시 환율은 매일 바뀌니 현장 확인 권장).

폰사반 은행 삼센타이 지점 앞 도로에 주차된 낡은 군용 지프, 뒤로 노란 SWIFT 송금 수수료 광고판과 붉은 등, 코끼리 석상
폰사반 은행 앞의 군용 지프. 옆 건물 앞에는 코끼리 석상과 붉은 등이 걸려 있었다.

비엔티안이 가난한 도시라는 인상만 갖고 오면 당황할 장면도 있다. 공공사업교통부 청사 앞 주차구획에 빨간 페라리 F430이 라오스 번호판(ວ2 2626)을 달고 서 있었다. 앞뒤로 라바콘까지 세워뒀다. 이 도시의 빈부 격차는 숨기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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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기둥의 공공사업교통부 청사 앞 도로변에 라바콘을 세워두고 주차된 빨간 페라리 F430, 뒤로 스쿠터와 승용차
공공사업교통부 청사 앞. 노란 라오스 번호판을 단 페라리.

거리 간판 중 제일 눈에 띄는 건 단연 거대한 나무 와인통이다. 건물 2층 높이를 통째로 오크통 모양으로 만들어 붙인 'baravin' 와인숍인데, 라오스에 프랑스 식민지 시절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걸 이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간판이 없다. 간판에 Vins & Spiritueux & Champagnes, 그리고 전화번호 856-21 217700이 적혀 있다. 옆 건물은 라오스 인도상공회의소.

건물 2층 높이를 차지하는 거대한 나무 와인통 모양 구조물과 그 아래 baravin savor's club 와인숍 간판, 옆에는 보석상 간판
거대한 오크통이 그대로 간판이 된 baravin. 프랑스 와인·샴페인을 취급한다고 적혀 있다.

일본 식당도 놀랄 만큼 많다. 이자카야 '市(ichi)'는 입구에 흰 초롱을 일곱 개쯤 걸어두고 스키야키, 돈코츠 라멘, 카쿠니 라멘 사진을 붙여놨다. 라오스까지 와서 라멘을 먹을 일인가 싶다가도, 셋째 날 저녁쯤 되면 국물이 그리워져서 결국 들어가게 된다. 나는 그렇게 됐다.

흰 종이 초롱이 여러 개 걸린 일본식 이자카야 市(ichi) 입구, 스키야키와 돈코츠 라멘 사진 포스터, 앞에 나무 테이블과 의자
이자카야 市(ichi). 오른쪽 포스터에 돈코츠 나베와 카쿠니 라멘.

카페는 태국계 체인 Café Amazon이 붉은 벽돌 아케이드에 크게 들어와 있다. 옆에 JDB 24시간 ATM이 붙어 있어서 현금 뽑고 커피 마시기 좋은 조합이다. 참고로 라오스 ATM은 인출 수수료가 붙고 1회 한도가 낮은 편이라, 나는 한 번에 최대한 뽑는 쪽을 택했다(수수료·한도는 은행마다 다르니 화면에서 확인).

큰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운 거리, 오른쪽 붉은 벽돌 아케이드 건물의 Café Amazon 매장과 JDB ATM 간판, 앞에 세워진 오토바이들과 지나가는 툭툭
붉은 벽돌 아케이드의 Café Amazon. 왼쪽 차선으로 툭툭이 지나간다.

거리 끝에 붙어 있는 신앙들

여행자거리를 걷다 보면 관광지로 정리되지 않은 종교 시설이 그냥 골목에 섞여 있다. 붉은 벽돌 상점 옆으로 뿌리를 드러낸 거대한 보리수가 서 있고, 그 뿌리 사이에 음료 노점이 자리를 잡았다. 나무 그늘이 도로 절반을 덮어서, 한낮에 여기 서 있으면 체감 온도가 확실히 몇 도는 내려간다.

도로변에 뿌리를 드러낸 거대한 보리수와 그 아래 자리 잡은 작은 노점, 붉은 벽돌 건물과 줄지어 세워둔 오토바이
뿌리째 드러난 보리수 아래 들어선 노점. 그늘이 도로 절반을 덮는다.

사원은 담장 너머로 갑자기 나타난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뒤덮인 문 뒤로 흰 스투파가 여러 기 서 있고, 문 옆에는 초록 얼굴의 수호신상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그 위로 전선 열몇 가닥이 그대로 지나간다. 이 조합이 비엔티안이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라오스 사원 정문과 흰색 스투파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여러 가닥의 전선, 담장 앞에 주차된 SUV들
사원 정문 위를 그대로 가로지르는 전선. 문 옆에 초록 얼굴의 수호신상이 서 있다.

조금 더 걸으면 중국식 사당도 있다. 하얀 석조 패방에 '福德廟'라고 새겨져 있고, 좌우 기둥에 '國泰民安', '風調雨順'이 금색으로 박혀 있다. 붉은 등이 줄줄이 걸린 걸 보면 명절 무렵이었던 듯하다. 화교 커뮤니티가 오래전부터 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물이다.

하얀 석조로 만든 중국식 패방에 福德廟 현판과 좌우 기둥의 國泰民安·風調雨順 글씨, 붉은 등이 걸린 사당 입구와 사자 석상
복덕묘(福德廟) 패방. 안쪽 마당까지 붉은 등이 이어진다.

위치와 이동 — 걸어서 다 된다

이 일대의 핵심은 다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남푸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안에 숙소, 식당, 야시장, 환전소, 사원이 전부 들어온다. 왓타이 국제공항에서는 차로 20분 안팎이고, 공항 택시는 카운터에서 정액 티켓을 사는 방식이라 흥정할 일이 없다(요금은 현장 게시 요금 확인). 시내에서 툭툭을 잡으면 반드시 타기 전에 가격을 말로 확정해야 한다. 나는 한 번 그냥 탔다가 내릴 때 부르는 값이 두 배여서 실랑이했고, 그 뒤로는 예외 없이 먼저 물었다. 아래 지도가 내가 사진을 찍은 지점이다.

해가 지면 이 거리가 본색을 드러낸다

오후 여섯 시 반쯤 전구 줄에 불이 들어오면 낮에 텅 비었던 길이 갑자기 사람으로 찬다. 내가 갔던 날은 저녁에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서 아스팔트가 젖어 있었는데, 그 젖은 바닥에 전구와 간판 불빛이 번져서 오히려 더 좋았다. Beerlao 간판, 한글 간판, 중국어 간판이 한 시야에 다 들어온다.

비에 젖어 불빛이 반사되는 밤거리, 전구 줄이 길 위로 늘어져 있고 양옆에 노점과 네온 간판, 오토바이를 탄 사람과 걸어다니는 여행자들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밤거리. 젖은 노면에 전구 불빛이 그대로 비친다.
밤의 넓은 거리에 전구 줄이 길게 이어지고 왼쪽에 분홍색 중국 음식점 간판, 오른쪽에 Beerlao와 파란 천막 노점, 스쿠터를 탄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
왼쪽 분홍 간판은 중국 음식점, 오른쪽엔 Beerlao 간판과 노점 천막. 밤에는 차보다 사람이 많다.

먹거리 노점은 붉은 차양을 친 매대가 한 줄로 이어진다. 유리 진열장 안에 새우 젓갈 절임, 각종 견과와 말린 과일, 꼬치, 철판 위 굴전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매대마다 라오어 간판에 전화번호가 크게 박혀 있어서(예: 020 9522 6069) 배달도 받는 모양이다. 가격은 매대마다 다르고 표시가 없는 곳도 많으니, 집기 전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마인지 먼저 묻는 게 마음 편하다.

붉은 차양을 친 야시장 먹거리 매대들, 유리 진열장 안에 견과와 말린 과일이 담긴 통들, 바닥에는 여러 가닥의 검은 전선이 늘어져 있고 한 남자가 지나간다
진열장 가득한 견과와 말린 과일. 바닥에 늘어진 전선 다발은 발에 걸리기 딱 좋다.

여기서 하나 짚고 싶은 게 있다. 위에서 본 전선 뭉치가 바닥에도 있다. 노점 전력선이 굵은 다발로 인도를 가로질러 깔려 있고, 비 온 날에는 그 위에 물이 고인다. 나무판자를 덮어둔 구간도 있지만 안 덮인 데가 더 많다. 사진 찍느라 뒷걸음질하다가 발이 걸릴 뻔했다. 밤에 야시장 걸을 땐 발밑을 한 번씩 보자 — 이게 이 글에서 가장 실용적인 조언이다.

야시장 먹거리 매대 앞 젖은 인도에 굵은 검은 전선 다발이 여러 가닥 늘어져 있고 그 위에 나무판자가 덮여 있는 모습, 매대에서는 조개와 꼬치를 굽고 있다
인도 위를 가로지르는 노점 전력선. 나무판자를 덮어둔 구간은 일부뿐이다.

야시장 성격의 장터는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다. 코라오 타워(KOLAO Tower) 쪽 주차장 한켠에도 천막 매대가 서는데, 분홍·하늘색 연 모양 장식을 매달아 놓아서 멀리서도 눈에 띈다. 여기는 먹거리보다 옷, 잡화, 액세서리 비중이 높았고 규모는 작다. 대신 사람이 덜 붐벼서 천천히 볼 수 있다.

해질 무렵 코라오 타워 옆 주차장에 선 천막 장터, 분홍색과 하늘색 연 모양 장식이 매달려 있고 잡화와 옷을 파는 매대, 오른쪽에 유리 건물
코라오 타워 옆 천막 장터. 연 모양 장식이 입구 표시 역할을 한다.

아쉬웠던 점

그래도 다시 오면 또 같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전봇대를 찍을 것 같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굴러가는 도시가 어떤 얼굴인지, 저 검은 덩어리 하나가 다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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