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세이 원년부터 이어온 흰 면 — 도쿄 니혼바시 다카시마야 '소혼케 사라시나 호리이'에서 냉 도로로소바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서 백화점 지하만 훑다가 밥때를 놓친 날이었다. 다카시마야 쇼핑센터 안 식당가를 어슬렁거리다 편백 결이 그대로 보이는 나무 벽에 総本家 更科堀井이라고 세로로 쓴 간판을 봤다. 그 옆에 작게 붙은 글자가 「創業寬政元年」. 간세이 원년이면 1789년이다. 프랑스 혁명이 나던 해에 문을 연 소바집이 백화…

도쿄 · 사라시나 호리이(総本家 更科堀井) 니혼바시 타카시마야점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서 백화점 지하만 훑다가 밥때를 놓친 날이었다. 다카시마야 쇼핑센터 안 식당가를 어슬렁거리다 편백 결이 그대로 보이는 나무 벽에 総本家 更科堀井이라고 세로로 쓴 간판을 봤다. 그 옆에 작게 붙은 글자가 「創業寬政元年」. 간세이 원년이면 1789년이다. 프랑스 혁명이 나던 해에 문을 연 소바집이 백화점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인데, 이 조합이 도쿄에서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아자부주반(麻布十番)에 본점이 있고 이곳은 니혼바시 다카시마야점이다.

편백 나무 벽에 '総本家 更科堀井 創業寬政元年'이라고 세로로 쓰인 간판과 자주색·검정 노렌이 걸린 가게 입구, 직원이 서 있는 모습
노렌 안쪽으로 카운터와 유리 진열장이 보인다. 입구에 "직원이 자리로 안내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으니 혼자 들어가 앉지 말 것.

메뉴판부터 천천히 볼 것 — 'さらしな'는 별도 가격이다

자리에 앉으면 냉소바(冷そば)와 온소바·우동(温そば/うどん)이 좌우로 나뉜 메뉴판을 준다. 여기서 처음 온 사람이 헷갈리기 딱 좋은 지점이 하나 있다. 메뉴판 아래 작은 글씨로 "표시 가격은 모리소바 기준이며, 사라시나는 +108엔, 계절 가와리소바는 +216엔"이라고 적혀 있다. 즉 왼쪽 상단의 もり 648엔, さらしな 756엔, 季節の変わりそば 864엔은 면 자체를 시킬 때 값이고, 아래쪽 とろろ나 鴨せいろ 같은 메뉴를 사라시나 면으로 바꾸면 그만큼 더 붙는다.

가격대는 대충 이렇다. 冷やしとろろ 1,101엔, 鴨せいろ 1,648엔, 天おろしそば 1,404엔, 온소바 쪽 かけ 648엔, 鴨南蛮 1,648엔. 사슴 고기를 쓴 鹿南蛮·鹿吸せいろ가 각각 1,648엔으로 올라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소바집에서 사슴을 파는 집은 흔치 않다. 내가 본 메뉴판 기준 가격이라 지금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니 현장 확인을 권한다.

냉소바와 온소바·우동이 좌우로 나뉜 일본어 메뉴판, 모리 648엔 사라시나 756엔 등 가격이 적혀 있다
왼쪽이 냉소바, 오른쪽이 온소바·우동. 맨 아래 주의 문구를 꼭 읽자.

젓가락 봉투에도 같은 문구가 찍혀 있다. 세 잎 문양 안에 '更科堀井' 네 글자를 넣은 마크, 그 옆에 창업 연도. 소바 나오기 전에 이런 걸 들여다보는 게 오래된 집에 온 재미다.

'創業寬政元年 総本家 更科堀井'과 세 잎 문양 로고가 인쇄된 흰 젓가락 봉투를 나무 테이블 위에서 찍은 사진
젓가락 봉투 앞면. 오른쪽 아래 붉은 낙관까지 찍혀 있다.

봉투를 뒤집으면 지점 세 곳의 전화번호가 나온다. 麻布十番本店 03-3403-3401, 立川伊勢丹店 042-540-8273, 日本橋高島屋店 03-6281-9939. 지점이 이 정도로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쿄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는 체인이 아니라, 갈 거면 이 셋 중 하나로 가야 한다.

젓가락 봉투 뒷면에 인쇄된 아자부주반 본점, 다치카와 이세탄점, 니혼바시 다카시마야점의 전화번호
봉투 뒷면. 니혼바시 다카시마야점은 03-6281-9939.

먼저 나온 다마고야키, 그리고 소바를 기다리는 시간

소바가 나오기 전에 다마고야키를 하나 시켰다. 두툼하게 두 토막, 옆에 갈아서 뭉쳐 놓은 무 같은 것이 곁들여 나온다. 겉은 반질반질하고 색이 진한데, 단맛이 세게 치고 나오는 종류는 아니다. 다시 향이 먼저 오고 단맛은 뒤에 옅게 깔린다. 접시가 백자에 하얀 유약이 흩뿌려진 것이라 노란색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흰 유약이 흩뿌려진 접시 위에 놓인 두툼한 노란 다마고야키 단면 클로즈업과 옆에 뭉쳐 놓은 갈색 간 무
단면을 보면 얇은 층이 여러 겹 겹쳐 있다.
접시 위에 나란히 놓인 다마고야키 두 조각과 곁들여진 간 무 한 덩이 전체 모습
나온 그대로. 두 토막이라 둘이 나눠 먹기 딱 좋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결이 그대로 보인다. 층 사이에 국물이 배어 있어서 무너질 듯 말 듯 하는데, 실제로 한 번 반쯤 흘렸다. 뜨거울 때 바로 집는 게 낫다.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다마고야키 조각의 단면, 얇은 달걀 층이 여러 겹 겹쳐 구멍이 송송 나 있다
층 사이가 촉촉하다. 뒤쪽 접시에 간 무가 아직 남아 있다.

냉 도로로소바 한 상 — 흰 면이 진짜 하얗다

주문한 건 차가운 도로로소바. 상이 차려지면 옻칠한 주홍 세이로에 담긴 면, 쓰유가 든 백자 주전자, 도로로가 담긴 검붉은 그릇, 날달걀 노른자 종지, 와사비와 쪽파 접시가 한꺼번에 놓인다. 처음 보면 뭘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잠깐 멈칫하게 된다.

주홍 세이로에 담긴 소바, 백자 쓰유 주전자, 김을 올린 도로로 그릇, 붉은 종지의 날달걀 노른자, 와사비와 흰 쪽파가 나무 테이블 위에 차려진 한 상
냉 도로로소바 한 상 전체. 구성이 이렇게 흩어져 나온다.

세이로에 올린 면 색을 보고 좀 놀랐다. 우리가 흔히 아는 회갈색 메밀면이 아니라, 국수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희다. 메밀 열매 한가운데 심만 써서 뽑는 사라시나 면이라 그렇다. 대신 향은 얌전하다. 진한 메밀 향을 기대하고 오면 첫입에 "어?" 소리가 나올 수 있는데, 몇 젓가락 지나면 은은한 단맛이 뒤에서 올라온다.

노른자는 붉은 옻칠 종지에 홀로 담겨 온다. 흰자 없이 노른자만, 그것도 거의 흠 없이 동그란 상태로. 이걸 그냥 삼키는 게 아니라 도로로에 풀어야 한다.

붉은 옻칠 종지 안에 흰자 없이 담긴 동그란 달걀 노른자 클로즈업
노른자만 따로. 붉은 칠기 바닥과 색 대비가 예쁘다.

도로로는 야마토이모를 간 것이라 물기 없이 뻑뻑하게 뭉쳐 있다. 그릇을 기울여도 흐르지 않을 정도. 그 위에 채 썬 김이 올라간다.

검붉은 그릇에 담긴 하얗고 되직한 도로로 위에 채 썬 김이 수북이 올라간 모습, 뒤로 소바가 보인다
도로로가 흐르지 않고 봉긋하게 서 있다.

쓰유는 위에서 들여다보면 거의 검다. 사라시나 계열 집의 쓰유는 대체로 진한 편인데 여기도 그렇다. 한 번에 다 붓지 말고 절반쯤 넣고 맛을 본 뒤 조절하는 게 낫다. 나는 처음에 다 부었다가 짜서 후회했다.

백자 주전자 안을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 거의 검게 보이는 진한 쓰유가 담겨 있다
주전자 속 쓰유. 색만 봐도 진하다.

와사비와 쪽파는 따로 작은 접시에 나온다. 쪽파는 흰 부분만 아주 얇게 저며 놓아서 매운맛이 거의 없고 아삭한 식감만 남는다.

흰 꽃 모양 작은 접시에 담긴 간 와사비 한 덩이와 얇게 썬 흰 쪽파
와사비와 흰 쪽파. 파를 다 넣으면 향이 도로로를 덮으니 조금씩.

도로로에 노른자를 깨 넣고, 쓰유를 부어 젓가락으로 휘저으면 색이 확 바뀐다. 하얗던 것이 옅은 갈색 무스처럼 되고 표면에 잔거품이 촘촘히 올라온다. 여기에 면을 담갔다 건지면 국물이 면에 매끄럽게 감긴다. 후루룩 삼키는 게 아니라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에 가깝다.

도로로와 노른자, 쓰유를 섞어 거품이 인 갈색 국물에서 젓가락으로 소바 면을 건져 올리는 모습
다 섞은 뒤 첫 젓가락. 국물이 면에 코팅되듯 붙는다.
'さらしなほりい' 글씨가 적힌 백자 잔 옆에서 젓가락으로 소바를 건져 올린 장면, 뒤쪽 접시에 다마고야키가 한 조각 남아 있다
왼쪽 잔에 'さらしなほりい'라고 적혀 있다. 뒤엔 아직 남은 다마고야키 한 조각.

마지막은 소바유 — 이걸 안 시키면 절반만 먹은 것

면을 다 먹을 때쯤 주홍 칠기 주전자에 소바유가 나온다. 뚜껑을 열면 뽀얗다 못해 회백색인 물이 가득 차 있다. 메밀을 삶은 물이라 아무 맛도 없을 것 같지만, 남은 쓰유 그릇에 부으면 그때부터 다르다.

주홍색 옻칠 주전자 안에 담긴 뽀얀 회백색 소바유를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
소바유. 이 정도로 뽀얗게 나오는 집이 많지 않다.

도로로와 노른자가 남은 그릇에 소바유를 부으면 거품이 다시 잔뜩 일어나면서 국물이 따뜻한 수프가 된다. 짜던 쓰유가 딱 마시기 좋게 풀리고, 김 조각이 떠다닌다. 이걸 두 번 리필해서 다 마셨다. 겨울에 이 한 그릇을 마시고 나오면 몸이 확 데워진다.

소바유를 부어 거품이 가득 인 갈색 국물 그릇에 젓가락이 걸쳐진 모습, 김 조각이 떠 있다
소바유를 부은 뒤. 거품이 이렇게 촘촘하게 일어난다.

가는 법과 몇 가지 실전 정보

니혼바시 다카시마야 쇼핑센터 안에 있어서 지하철 니혼바시역에서 지하로 바로 이어진다. 비 오는 날에도 우산 펼 일이 없다는 게 이 지점의 가장 큰 장점이다. 백화점 식당가라 좌석 간격이 넓고 테이블도 나무 재질로 깔끔한데, 대신 오래된 소바집 특유의 좁고 어두운 분위기를 기대했다면 그건 아자부주반 본점 쪽이 맞다.

아쉬웠던 건 하나. 사라시나 면은 확실히 곱고 예쁘지만, 메밀 자체의 거친 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도 첫 젓가락에서는 살짝 밋밋하다고 생각했다. 도로로와 노른자를 섞고 나서야 이 면이 왜 이렇게 하얀지 이해가 됐다. 진한 걸 얹어도 면이 무너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킨다. 다음에 오면 사슴 고기를 쓴 鹿吸せいろ를 시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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