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밟으며 와세다 캠퍼스 한 바퀴 — 도쿄 신주쿠구 와세다대학교, 11월 말의 오후
도쿄 지하철 도자이선 와세다역에서 나와 언덕을 조금 오르면 바로 와세다대학 와세다캠퍼스다. 전날까지 비가 왔고 이날은 구름이 두꺼웠는데, 골목을 하나 꺾자마자 건물 사이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노랗게 서 있었다. 전깃줄이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평범한 이면도로인데, 나무 하나가 골목 전체의 색을 바꿔놓는다. 도쿄에서 단…
도쿄 · 와세다대학교
도쿄 지하철 도자이선 와세다역에서 나와 언덕을 조금 오르면 바로 와세다대학 와세다캠퍼스다. 전날까지 비가 왔고 이날은 구름이 두꺼웠는데, 골목을 하나 꺾자마자 건물 사이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노랗게 서 있었다. 전깃줄이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평범한 이면도로인데, 나무 하나가 골목 전체의 색을 바꿔놓는다. 도쿄에서 단풍 명소를 찾을 때 보통 메이지진구가이엔이나 쇼와기념공원을 먼저 떠올리지만, 대학 캠퍼스는 사람이 훨씬 적고 입장료도 없다.

커피 한 잔 들고 걷기 좋은 은행나무 길
이 캠퍼스에서 가장 마음에 든 건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걷는 시간 자체였다. 종이컵이든 머그든 커피 한 잔 들고 은행나무 길을 천천히 왕복하는 것, 그게 이날 오후의 전부였는데 그게 제일 좋았다. 바람이 불면 잎이 후드득 떨어지고, 발밑에서 마른 잎 밟히는 소리가 난다. 은행 열매 특유의 냄새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 캠퍼스 안쪽 가로수는 열매가 잘 안 달리는 수나무 위주인 듯했다. 벤치가 길 옆에 띄엄띄엄 놓여 있어서 아무 데나 앉아도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 캠퍼스에서 제일 조용한 건물
은행나무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쪽은 오래된 벽돌 건물, 오른쪽은 흰 건물에 나무 살대 캐노피가 비스듬히 뻗어 나온 곳이 나온다. 이게 와세다대학 국제문학관, 흔히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건축가 구마 겐고 설계로, 밖에서 보면 살대가 파도처럼 휘어 건물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길에서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으니 오른쪽 처마를 한 번 올려다보길.



입구 표지판은 화단 수풀 사이에 낮게 박혀 있다. 「村上春樹ライブラリー / The Haruki Murakami Library」. 크게 써 붙인 간판이 없어서 처음 온 사람은 한 번 지나쳤다가 되돌아오게 된다.


안에 들어서면 계단이 곧장 나오는데, 계단 양옆 벽이 전부 책장이다. 아치형 나무 프레임이 계단을 감싸면서 아래층까지 이어지고, 책은 장르가 아니라 「動物が好き(동물을 좋아해)」「日常の謎(일상의 수수께끼)」 같은 기분 단위로 묶여 있다. 실내는 신발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고, 계단에 앉아 책 읽는 사람이 두어 명 있었다. 사진 찍는 사람이 많은 곳인데도 다들 말없이 움직인다.



지하로 내려가면 유리벽 너머로 「Author's Study(村上さんの書斎)」가 있다. 작업 책상, 스탠드, 레코드가 빽빽한 선반, 그리고 턴테이블과 앰프. 유리 안쪽으로는 못 들어가고 밖에서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유리 반사가 심해서 사진은 잘 안 나오는데, 그냥 눈으로 한참 보는 편이 낫다.


한쪽 벽에는 작품 제목을 붙인 작은 일러스트들이 전시돼 있었다. 회색 고양이 밑에 『ふわふわ』(푹신푹신), 옆에는 땅콩 그림, 그 옆은 『~フランス人』. 그림책과 단편 제목들을 이렇게 스티커처럼 붙여놨는데, 벽 전체를 훑는 데 몇 분 안 걸린다.

지하 카페 이름이 오렌지 캣(橙子猫)이다. 학생들이 운영하는 곳이고, 주문하면 오렌지색 번호표를 준다. 손바닥만 한 종이 태그에 흰 숫자 4. 자리 번호인지 주문 번호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커피는 회색 머그에 나온다. 머그에 「橙子猫 ORANGE CAT」과 THE WASEDA INTERNATIONAL HOUSE OF LITERATURE가 새겨져 있다. 맛은 산미 적고 묵직한 쪽, 도쿄 카페 평균보다 진했다. 가격은 몇백 엔대였는데 정확한 금액은 기억이 흐리다 — 메뉴판은 카운터 위에 붙어 있으니 현장 확인을 권한다. 여기서 받은 커피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 은행나무 길을 걷는 코스, 이게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실내는 조용해서 좋고, 밖은 잎이 떨어져서 좋다.

연극박물관 — 튜더 양식 건물 한 채
라이브러리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갑자기 영국 시골 건물 같은 게 나온다. 쓰보우치 박사 기념 연극박물관이다. 반목조(하프팀버) 외관에 붉은 기와, 현관 위에는 라틴어로 Totus Mundus Agit Histrionem(온 세상은 무대다)이 새겨져 있다. 앞마당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었고, 「日中演劇交流展」과 「北大路欣也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전시는 회차마다 바뀌니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하다.



오쿠마 강당 앞 큰길과 위치·접근성
연극박물관에서 조금 더 걸으면 캠퍼스의 메인 스트리트가 나온다. 시야 끝에 시계탑이 서 있고, 길 양쪽은 전부 은행나무다. 이 구간은 바닥이 아예 노랗게 덮여 있었다. 오후 4시쯤 되니 빛이 낮아지면서 벽돌색 건물과 노란 잎이 같이 물든다.
가는 법은 간단하다. 도쿄메트로 도자이선 와세다역 3b 출구에서 도보 5분 안팎, 언덕을 살짝 오르면 정문 쪽이다. JR 다카다노바바역에서는 도보 20분 정도 걸리니 그쪽에서 온다면 버스나 도자이선 한 정거장을 타는 게 낫다. 캠퍼스는 담장 없이 열려 있어서 별도 입장 절차가 없고, 강의동 내부는 학생·교직원 공간이라 들어가지 않는 게 맞다. 촬영한 지점의 좌표는 아래 지도에 찍어뒀다.



오쿠마 강당은 가까이서 올려다보면 생각보다 크다. 벽돌 표면이 오래돼 색이 얼룩덜룩하고, 시계 문자판은 로마숫자다. 정면 광장에는 경비원이 한 명 서 있었고, 관광객보다 지나가는 학생과 동네 주민이 더 많았다.


강당 옆 잔디밭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동상이 서 있다. 학위복 차림에 두루마리를 든 모습인데, 해 질 무렵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면서 실루엣만 남았다. 뒤쪽으로는 공사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 캠퍼스 곳곳이 공사 중이라 사진 각도가 제한되는 구간이 있다.


지나가다 안뜰 창 너머로 학생식당이 보였다. 긴 나무 테이블에 학생들이 흩어져 앉아 밥 먹고 떠들고 있었다. 외부인이 이용 가능한 식당도 캠퍼스 안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날은 시간이 어정쩡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점심때 맞춰 오면 저렴하게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선택지다.

오쿠마 정원 — 은행나무 다음은 단풍
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오쿠마 정원이 있다. 여기부터는 색이 바뀐다. 은행나무의 노랑이 아니라 단풍의 주황과 빨강이다. 벽돌 포장 산책로가 완만하게 휘고, 석등과 다듬은 관목이 배치된 일본식 정원인데 규모가 크지 않아 15분이면 한 바퀴 돈다. 잔디밭은 이미 겨울색으로 누렇게 말라 있었고, 거기 앉아 쉬는 사람이 몇 있었다.





다녀와서 정리한 것들
- 시기: 이날은 11월 말. 은행나무는 절정을 살짝 지나 바닥에 잎이 많이 깔린 상태였고, 오쿠마 정원 단풍은 딱 좋았다. 노란 잎이 나무에 달린 모습을 보려면 11월 중순이 안전하다.
- 동선: 도자이선 와세다역 → 국제문학관(하루키 라이브러리) → 연극박물관 → 메인 스트리트·오쿠마 강당 → 오쿠마 정원. 천천히 걸어서 두 시간 반쯤 걸렸다.
- 하루키 라이브러리: 운영시간과 입장 방식(예약 여부 포함)이 바뀌는 곳이라 방문 전 공식 사이트 확인 권장. 지하 오렌지 캣 카페는 학생이 운영한다.
- 주의: 여기는 관광지가 아니라 학교다. 강의동 안, 학생이 공부 중인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편이 좋다. 캠퍼스 일부는 공사 중이라 가림막이 있다.
- 날씨: 이날 낮 기온은 외투 하나로 충분했지만, 해가 지고 나니 바람이 차가워졌다. 정원까지 볼 계획이면 얇은 목도리 하나 챙기는 게 낫다.
커피를 다 마시고 정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종이컵이 아니라 머그로 마셨으면 그 자리에서 더 오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오면 커피는 카페 안에서 마시고, 밖에 나와서는 그냥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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