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 중앙공원, 도청 그림자 아래 잔디밭에서 반나절

도쿄 신주쿠에서 사흘째 되던 날, 니시신주쿠 고층빌딩 사이를 걷다가 다리가 먼저 항복했다. 지도를 보니 도쿄도청 바로 옆에 신주쿠 중앙공원(新宿中央公園)이 있길래 그냥 방향만 잡고 들어갔다. 신주쿠역 서쪽 출구 기준으로 도보 15분쯤, 도청을 지나면 바로 초록이 나온다. 빌딩 숲을 뚫고 들어온 사람이라 그런지 나무 그늘에…

도쿄 · 신주쿠 중앙공원

도쿄 신주쿠에서 사흘째 되던 날, 니시신주쿠 고층빌딩 사이를 걷다가 다리가 먼저 항복했다. 지도를 보니 도쿄도청 바로 옆에 신주쿠 중앙공원(新宿中央公園)이 있길래 그냥 방향만 잡고 들어갔다. 신주쿠역 서쪽 출구 기준으로 도보 15분쯤, 도청을 지나면 바로 초록이 나온다. 빌딩 숲을 뚫고 들어온 사람이라 그런지 나무 그늘에 발을 딛는 순간 체감 온도가 훅 떨어졌다.

잔디밭에 사람이 눕는 방식

가장 넓은 잔디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공중에 떠 있는 지구본이었다. 크레인 같은 철제 구조물에 매달린 큰 구(球)에 대륙과 구름이 그대로 인쇄돼 있어서, 처음엔 무슨 전시인가 싶어 한참 올려다봤다. 그 아래로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는 가족, 유모차를 세워두고 앉은 부모들, 아무렇게나 대자로 누워 휴대폰을 보는 사람. 내 바로 앞에서는 한 남자가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고, 왼쪽에는 보온병까지 챙겨온 커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주쿠 중앙공원 잔디 광장에 매달린 지구본 조형물과 그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누워 쉬는 사람들, 뒤로는 유리 고층빌딩
지구본 조형물 아래 잔디밭.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자리가 계속 채워졌다.

여기서 처음 온 사람이 놓치기 쉬운 게 있다. 이 공원 잔디는 한국 도심 공원처럼 "들어가지 마시오"가 아니다. 낮은 나무 말뚝과 초록색 줄로 구역만 표시해뒀을 뿐, 사람들은 그 안에서 신발 벗고 눕는다. 외국인 관광객도 꽤 보였는데, 배낭 내려놓고 잔디에 그대로 드러누운 서양인 커플이 특히 자연스러웠다. 나도 따라 앉아봤더니 잔디가 생각보다 짧고 단단하다. 비 온 다음 날이라 흙이 살짝 눅눅해서, 돗자리 없이 바지로 앉은 건 좀 후회했다. 편의점 비닐이라도 하나 챙기는 걸 권한다.

계단식 데크와 바로 옆 카페

잔디밭 남쪽으로 나오면 나무 데크로 만든 계단식 관람석이 있다. 여기가 이 공원에서 사람 밀도가 제일 높은 자리다. 한쪽 끝에서 아저씨 한 분이 클래식 기타를 튕기고 있었고, 악보대를 세워두고 진지하게 연주하는데 아무도 몰려들지 않고 각자 앉아 각자 쉬는 그 거리감이 좋았다. 소리는 잔잔하게 깔리는 정도. 시끄럽지 않다.

나무 계단식 데크에 앉아 쉬는 사람들, 오른쪽에 기타 치는 연주자와 뒤편 스타벅스 매장 간판, 배경에 유리 고층빌딩
계단식 데크. 오른쪽 벽돌 건물이 스타벅스, 그 옆으로도 매장이 이어진다.

사진 오른쪽 벽돌 건물이 스타벅스다. 공원 안에서 걸어서 1분. 이게 이 공원의 진짜 강점이라고 본다. 도심 공원인데 화장실과 카페가 잔디밭 코앞에 붙어 있어서, 커피 한 잔 들고 나와 데크에 앉으면 그대로 몇 시간이 간다. 공원 밖 니시신주쿠 골목으로 나가도 카페가 줄줄이 있어서 선택지가 넘친다. 나는 아이스 라떼를 들고 나와 데크 두 번째 칸에 앉아 40분쯤 아무것도 안 했다. 도쿄에서 그렇게 돈 안 쓰고 보낸 시간이 그 여행 통틀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물소리 나는 구석, 아이들이 몰리는 곳

공원 북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벽을 타고 물이 떨어지는 인공 폭포 구역이 나온다. 수면 위로 스테인리스 관이 여러 개 꽂혀 있는 설치물이 있고, 물이 얕게 고여 있다. 여기가 아이들 자석이다. 노란 모자 쓴 꼬마부터 초등학생까지 난간 아래 콘크리트 턱에 쪼그려 앉아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모들은 뒤에서 지켜보고, 파란 안전 펜스가 물가를 막아둔 구간도 있었다.

인공 폭포와 얕은 물가에 쪼그려 앉아 물속을 들여다보는 아이들, 뒤로 파란 안전 펜스와 지켜보는 어른들
폭포 아래 물가. 아이 데려온 가족은 대부분 이쪽에서 시간을 보낸다.

물 떨어지는 소리 덕에 이 근처만 체감 온도가 다르다. 여름에 오면 여기 벤치가 먼저 찬다. 다만 사진에서도 보이듯 공사용 펜스와 전선이 그대로 노출된 구간이 있어서 풍경 사진 찍기엔 어수선하다. 예쁜 컷을 원하면 잔디 광장 쪽이 낫다.

산책로에서 마주친 것들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아스팔트 산책로가 있는데, 이 길이 은근히 재미있다. 수국이 무리 지어 핀 화단 구간에서는 관목 사이로 흰색 꽃 모양 조형물이 몇 개 솟아 있었다. 종이접기처럼 각진 꽃잎이라 진짜 꽃과 섞여 있으니 순간 헷갈렸다. 위를 올려다보면 나무 사이로 회색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이 대비가 신주쿠 중앙공원의 성격을 한 장에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산책로 옆 수국 관목 사이에 세워진 흰색 꽃 모양 조형물들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고층 건물
산책로변 수국 화단. 흰 꽃 모양 조형물이 관목 위로 솟아 있다.

다른 쪽 잔디 언덕에서는 흰 덩굴 같은 소재로 만든 말 두 마리 조형물을 봤다. 뒷다리로 서 있는 자세라 멀리서도 눈에 띈다. 그 앞 잔디에는 또 사람들이 누워 있고, 아이 손잡고 지나가는 가족이 있고, 유모차를 세워둔 무리가 있었다. 조형물 옆에는 작은 안내판이 서 있었는데 일본어라 자세히는 못 읽었다. 정확한 작품 정보는 현장 안내판 확인을 권한다.

넓은 잔디밭 위 뒷다리로 선 흰색 말 두 마리 조형물과 그 주변에 앉거나 누워 쉬는 사람들, 나무 말뚝과 초록 줄로 구분된 잔디 경계
흰 말 조형물이 서 있는 잔디 언덕. 오른쪽에 아예 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잔디밭을 반대편 산책로에서 다시 보면 청동 인물상이 하나 서 있고, 그 너머로 흰 말 조형물이 작게 걸린다. 배경에는 아파트 한 동. 이날은 하늘이 두껍게 흐려서 사진이 전체적으로 회색인데, 오히려 덕분에 덥지 않게 걸었다. 도쿄 6월은 습해서 맑은 날보다 이런 날이 걷기엔 낫다.

흐린 하늘 아래 산책로에서 바라본 잔디 언덕, 청동 인물 조각상과 멀리 보이는 흰 말 조형물, 배경의 고층 아파트
산책로 반대편에서 본 같은 잔디밭. 가운데 청동 인물상.

위치와 가는 법

JR 신주쿠역 서쪽 출구에서 도쿄도청 방향으로 직진하면 도보 15분 안쪽. 도에이 오에도선 도초마에(都庁前)역에서 나오면 훨씬 가깝다. 지하도로 도청까지 연결되니 비 오는 날엔 이쪽이 편하다. 도청 전망대(무료)를 보고 나와서 이 공원으로 넘어오는 동선이 제일 자연스럽다.

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

신주쿠에서 쇼핑하고 밥 먹고 또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에 치인다. 그때 이 공원에 20분만 앉아 있으면 오후가 다시 굴러간다. 관광지 목록에 넣을 곳은 아니지만, 신주쿠 일정에 쉼표 하나가 필요하다면 여기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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