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히라노 신사(平野神社) — 벚꽃 없는 1월, 백제계 조상신을 모신 경내를 걸었다

기타노텐만구에서 북쪽으로 걸어 5분 남짓. 관광버스가 서지 않는 골목 끝에 히라노 신사(平野神社)가 있다. 교토 기타구(北区), 니시오지(西大路) 언저리다. 벚꽃철이면 이 일대가 사람으로 막히는데, 내가 간 날은 1월 초 평일 오전이었다. 참배객이 열댓 명. 자갈 밟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교토 · 히라노 신사

기타노텐만구에서 북쪽으로 걸어 5분 남짓. 관광버스가 서지 않는 골목 끝에 히라노 신사(平野神社)가 있다. 교토 기타구(北区), 니시오지(西大路) 언저리다. 벚꽃철이면 이 일대가 사람으로 막히는데, 내가 간 날은 1월 초 평일 오전이었다. 참배객이 열댓 명. 자갈 밟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주황색 큰 도리이를 향해 뻗은 돌길 양옆으로 '奉燈'이라 적힌 붉은 등롱 기둥이 늘어선 히라노 신사 남쪽 참도
남쪽 참도. 붉은 등롱 기둥에 '奉燈' 글자가 새겨져 있고, 도리이 너머로 그냥 동네 주택가와 전신주가 보인다.

이 사진이 히라노 신사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리이 밖이 관광지가 아니라 생활권이다. 신호등, 전깃줄, 흰 아파트. 참도를 다 걸어 나가면 바로 횡단보도다. 교토의 유명 사찰들이 산자락에 숨어 있는 것과 달리 여기는 동네 한복판에 그대로 박혀 있다.

백제 도래계 왕실 조상신을 모신 자리

히라노 신사가 다른 교토 신사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다. 주신인 이마키노카미(今木神)를 비롯한 네 기둥의 신은 원래 나라 헤이조쿄 궁 안에서 모시던 신인데, 794년 헤이안 천도 때 이 자리로 함께 옮겨 왔다. 그 신들의 뿌리를 거슬러 가면 간무 천황의 생모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에 닿는다. 백제 무령왕의 후손을 자처한 야마토노 후미(和史) 씨족 출신이다. 즉 백제계 도래인 혈통의 조상신을 일본 왕실이 궁 안에서 모셔 오다가, 새 수도로 옮기며 이곳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마키(今木)'라는 이름 자체가 '지금 막 건너온'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도래인의 신이라는 성격이 이름에 남아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을 알고 가느냐 모르고 가느냐에 따라 경내 체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알고 갔고, 배전 앞에 섰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한국 관광객 코스에 거의 안 잡힌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잎이 다 떨어진 벚나무들 사이로 주황색 대형 도리이가 서 있고 참배객 몇 명이 돌길을 걷는 겨울 히라노 신사 경내
경내 쪽에서 본 도리이. 양옆 앙상한 가지가 전부 벚나무다. 4월엔 이 화면이 통째로 분홍색이 된다.

사진 속 벌거벗은 나무들이 히라노 신사를 유명하게 만든 벚나무다. 60여 품종에 400그루 가까이 심겨 있고,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품종별로 시차를 두고 핀다. 겨울에 가면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대신 나무 사이 간격과 가지가 뻗은 폭이 그대로 보여서, 꽃이 피면 얼마나 빽빽할지 계산이 된다. 나는 이 앙상한 버전이 싫지 않았다.

남문과 배전 — 왕실 문양이 걸린 곳

이끼 낀 지붕과 짙은 나무 기둥의 히라노 신사 남문, 국화 문양 흰 막이 걸려 있고 양옆에 벚꽃이 그려진 흰 등롱이 서 있다
남문. 문 안쪽 흰 막에 국화 문양, 등롱에는 붉은 벚꽃. 오른쪽이 부적·오마모리 수여소다.

문에 걸린 흰 막의 국화 문양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라. 궁 안에서 모시던 신을 옮겨 왔다는 내력이 이 문양 하나에 남아 있다. 등롱에 그려진 붉은 꽃은 벚꽃, 이 신사의 신문(神紋)이다. 국화와 벚꽃이 한 문 안에 같이 걸린 구성이 히라노 신사의 정체성을 압축한다.

문 왼편에 요금 안내판과 나무 헌금함이 놓여 있는데, 이건 경내 입장료가 아니라 특정 구역(벚꽃철 사쿠라엔 등) 관련 안내다. 평상시 경내 참배 자체는 무료로 들어갔다. 시기와 구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현장 안내판 확인을 권한다. 오른쪽 수여소는 비닐 가림막을 치고 운영 중이었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시간대도 있어 보였다.

지붕 위에 황금빛 치기가 여러 쌍 솟은 히라노 신사 본전과 배전, 붉은 벚꽃 등롱과 시메나와가 걸려 있다
배전 정면. 지붕 위로 금색 치기(千木)가 네 쌍 솟아 있다.

이 건물이 히라노 신사의 핵심이다. 지붕을 보면 금색 치기가 여러 쌍 솟아 있는데, 네 기둥의 신을 모시는 사전(社殿) 두 채를 붙여 놓은 구조다. 이 형식을 따로 '히라노즈쿠리(比翼春日造)'라고 부른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지붕이라 건축을 좋아하면 한참 서 있게 된다. 나는 정면에서, 그다음 왼쪽으로 옮겨 지붕선이 겹치는 각도에서 또 찍었다. 처마 아래 초가 지붕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게 사진에도 보이는데, 보수 전이었던 듯하다.

참배는 이례(二禮)·이박수(二拍手)·일례(一禮). 겨울 아침이라 데미즈야(手水舎) 물이 얼음장이었다. 손이 시려서 대충 헹구고 말았는데, 뒤에 온 일본 할머니가 제대로 두 손 다 적시고 국자 손잡이까지 물로 씻어 내리는 걸 보고 좀 반성했다.

스사노오·구스노키 — 경내 안쪽의 작은 것들

밑동에 흰 시메나와를 두른 거대한 녹나무와 그 둘레를 감싼 나무 데크, 뒤로 신사 부속 건물과 석등이 보인다
경내 신목인 큰 녹나무. 밑동에 시메나와가 둘리고 데크가 깔려 있어 나무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배전 옆으로 돌아 나오면 이 나무가 나온다. 밑동이 어른 서넛이 팔을 벌려야 닿을 굵기다. 시메나와가 둘려 있으니 신목이고, 둘레에 나무 데크를 짜 놓아서 뿌리를 밟지 않고 한 바퀴 돌 수 있게 해 뒀다. 겨울인데도 잎이 무성한 상록수라 이 구역만 유독 그늘지고 공기가 다르다. 벚꽃철 인파를 피하려면 이 나무 그늘 쪽이 답이다.

'櫻池'라 새겨진 돌기둥 옆, 奉納 글자가 붙은 주황색 도리이가 줄지어 선 좁은 길에서 파란 패딩을 입은 두 아이가 브이 자세를 하고 서 있다
경내 끝 스에샤(말사)로 이어지는 연속 도리이. 왼쪽 돌기둥에 '櫻池(사쿠라이케)'.

여기가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든 구석이다. 경내 안쪽으로 들어가면 '奉納'이라 쓰인 작은 도리이가 열 개 남짓 이어진 좁은 길이 나온다. 후시미이나리의 센본토리이를 아주 축소해 놓은 모양인데, 길이가 짧아서 10초면 통과한다. 대신 사람이 없다. 후시미에서 인파에 밀려 사진 한 장 못 건진 사람이라면 여기서 원 없이 찍으면 된다. 우리 애들도 여기서 제일 신나 했다. 도리이 끝에 붉은 작은 사당이 있고, 왼쪽 돌기둥의 '櫻池'는 벚꽃 연못이라는 뜻이다.

나무색이 그대로 드러난 낡은 도리이 안쪽에 '記念碑'라고 크게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는 경내 한쪽 구역
색이 다 빠진 나무 도리이와 그 안의 '記念碑'. 비면 오른쪽 작은 글씨는 마모가 심해 읽지 못했다.

같은 경내인데 이쪽 도리이는 칠이 완전히 벗겨져 회색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앞의 주황색 도리이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시간 차가 확 느껴진다. 안쪽 비석에는 '記念碑' 세 글자만 큼직하게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 세로로 작은 글씨가 있는데 이끼와 마모 때문에 나는 읽어 내지 못했다. 무슨 기념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 사진만 찍고 돌아 나왔다. 이런 게 아쉬운 지점이다 — 히라노 신사는 일본어 안내판조차 드문드문하고, 영어나 한국어 설명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가는 법과 실제로 도움 되는 것들

겨울의 히라노 신사는 볼거리가 많은 곳이 아니다. 한 시간이면 구석까지 다 돈다. 그런데도 다시 오고 싶은 이유는, 백제계 혈통의 조상신을 1200년 넘게 이 자리에서 계속 모셔 왔다는 사실이 관광용 안내판이 아니라 그냥 동네 신사의 일상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자갈 밟고, 국화 문양 지나, 차가운 물에 손 씻고, 두 번 절한다. 그게 전부다. 다음엔 벚꽃 필 때 와서 이 앙상한 가지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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