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코코마에 건널목, 에노덴 앞에서 교복 입은 사람들 틈에 끼어 서 있던 오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에노시마전철(에노덴)이 국도 134호선을 가로지르는 그 건널목. 지도에는 '가마쿠라코코마에역 앞 건널목'이라고 나오지만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슬램덩크 기찻길로 통한다. 오프닝에서 강백호가 서 있던 그 자리. 나는 후지사와에서 에노덴을 타고 들어갔는데, 열차가 코코마에역에 서기도 전부터 창밖에 사람…

가나가와 · 슬램덩크 기찻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에노시마전철(에노덴)이 국도 134호선을 가로지르는 그 건널목. 지도에는 '가마쿠라코코마에역 앞 건널목'이라고 나오지만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슬램덩크 기찻길로 통한다. 오프닝에서 강백호가 서 있던 그 자리. 나는 후지사와에서 에노덴을 타고 들어갔는데, 열차가 코코마에역에 서기도 전부터 창밖에 사람 머리통이 잔뜩 보여서 아 여기구나 싶었다.

에노덴은 앞칸 맨 앞자리를 노려라

여기까지 왔으면 건널목만 찍고 갈 게 아니라 에노덴 자체를 타봐야 한다. 후지사와역에서 출발할 때 운전실 바로 뒤 유리창 앞에 서면 선로가 그대로 앞으로 뻗어나가는 게 보인다. 폭이 좁다. 양옆으로 남의 집 담벼락과 빨래 널린 베란다가 손 닿을 거리에 지나간다. 속도 제한 표지가 30이라고 붙어 있는 구간이 있는데, 실제로도 그 정도 속도로 살살 기어간다.

에노덴 운전실 뒤 유리창 너머로 좁은 주택가 사이를 지나가는 단선 선로와 30 속도 제한 표지가 보이는 전면 풍경
앞칸 유리창 너머. 민가 담벼락 사이를 지나는 단선 구간, 오른쪽에 30 제한 표지.

중간에 에노시마역을 지나 고시고에 근처로 나오면 갑자기 선로가 도로 위로 올라온다. 전철이 자동차랑 같은 아스팔트를 나눠 쓰는 구간이다. 신호등 옆에 '전차접근' 전광판이 빨갛게 뜨고, 기사가 흰 장갑 낀 손으로 마스콘을 조금씩 밀면서 커브를 돈다. 왼쪽 창밖에 류코지(龍口寺) 절 입구와 파란색 '龍口テラス' 안내 간판이 스쳐 지나간다. 이 구간이 짧게는 200~300m쯤인데, 노면전차 타는 기분이 나서 나는 이 구간이 제일 좋았다.

흰 장갑을 낀 에노덴 기관사가 마스콘을 잡고 있고 창밖으로 류코지 절 입구와 파란 안내 간판, 도로 위 노면 선로가 보이는 모습
고시고에 부근 노면 구간. 왼쪽 언덕이 류코지, 전차가 자동차 도로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건널목 앞은 정말 정신이 없다

가마쿠라코코마에역에서 내려 개찰구를 나오면 바로 그 건널목이다. 역에서 도보 30초, 아니 그냥 눈앞이다. 차단기가 내려가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선로 앞에 줄지어 서 있고, 그 너머로 국도 134호선과 사가미만이 통째로 펼쳐진다. 처음 이 각도를 본 순간 왜 여기가 그렇게 유명한지 한 번에 이해했다. 바다가 도로 바로 뒤에 붙어 있어서 파도 소리가 차 소리를 뚫고 올라온다.

노란 검정 줄무늬 차단기 너머로 국도 134호선을 지나가는 승용차들과 그 뒤로 이어지는 파란 사가미만 바다
차단기 안쪽에서 본 국도 134호선. 도로 바로 뒤가 바다다.

이 건널목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하나다. 슬램덩크 오프닝 장면. 그래서 여기 오는 사람들 상당수가 사진 한 장 건지려고 온 사람들이다. 나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진짜 놀란 건 교복을 챙겨 입고 온 사람들이었다. 세일러복, 빨간 리본, 흰 양말에 로퍼까지 세트로 갖춰 입고 와서 차단기 옆에 서 있는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 대여 교복인지 본인 옷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강백호나 채치수처럼 서서 각을 잡고, 일행은 반대편에 쪼그려 앉아 스마트폰을 들고 타이밍을 잰다.

차단기가 올라간 건널목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이 선로 옆에 서 있고 도로 건너편으로 바다와 지나가는 차들이 보이는 오후 풍경
전철이 지나간 직후. 카메라를 목에 건 사람이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재미있는 건 아무도 서로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 같은 목적으로 왔으니까. 차단기 종소리가 땡땡땡 울리기 시작하면 사방에서 카메라가 일제히 올라간다. 그 순간의 긴장감이 꽤 웃기다. 다들 숨을 참는다.

세일러복을 입은 사람들과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차단기 앞에 몰려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건널목 풍경, 뒤로 사가미만과 붉은 신호등
차단기가 내려가고 신호가 붉게 켜진 순간. 왼쪽 세일러복, 앞쪽엔 폰을 든 사람. 이 각도로만 십수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초록색과 크림색으로 칠한 에노덴이 오른쪽에서 들어온다. 생각보다 소리가 크다. 레일 이음매 지나가는 덜컹 소리와 팬터그래프 스치는 소리가 같이 온다.

초록색과 크림색 에노덴 전동차 앞머리가 오른쪽에서 건널목으로 들어오고 왼쪽에는 세일러복 입은 사람이 서 있는 장면
열차 진입. 앞머리가 프레임에 들어오는 이 0.5초를 다들 기다린다.
차량번호 1552가 적힌 에노덴 객차가 바다를 배경으로 건널목을 지나가고 창문 안으로 승객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
1552호 차량. 창 안쪽 승객들도 이쪽을 찍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찍는 상황.

처음 오는 사람이 놓치기 쉬운 점을 몇 가지 적어둔다.

건널목 뒤편 언덕과 해질녘 바다

사람에 치이다가 건널목에서 등을 돌려 언덕 쪽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에 전차선이 한 줄 가로질러 있고, 그 아래로 바다 보는 집들이 층층이 붙어 있다. 원통형으로 튀어나온 3층집, 유리 난간을 두른 테라스. 이 동네는 바다 전망 하나로 값이 매겨지는 곳이구나 싶었다.

짙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차선 아래로 원통형 벽면과 유리 난간을 갖춘 언덕 위 주택들이 늘어선 모습
건널목 반대편 언덕. 바다를 보려고 지어진 집들.

해가 낮아지자 바다 쪽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른쪽 멀리 에노시마 섬과 전망대 실루엣이 뜨고, 수면에 빛기둥이 길게 깔린다. 인도에 서서 이걸 한참 봤다. 도로 건너기 전에 발밑을 보면 점자블록과 아스팔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해가 낮게 걸린 바다 위로 빛기둥이 깔리고 오른쪽 멀리 에노시마 섬과 전망대 실루엣이 보이는 국도변 횡단보도 풍경
오른쪽 볼록 솟은 섬이 에노시마. 꼭대기 가느다란 게 전망대다.

도로만 건너면 바로 해변이다

여기 온 사람 대부분이 건널목만 찍고 다시 전철을 탄다. 나는 국도를 건너서 계단으로 모래사장까지 내려가봤는데, 이게 이날의 진짜 소득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해변은 겨울 오후라 사람이 다섯 명 남짓. 그림자가 모래 위에 길게 뻗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해변에 사람 몇 명이 흩어져 걷고 있고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오는 모습
도로 위 인도에서 내려다본 해변. 사람이 이 정도밖에 없다.
해가 오른쪽 위에 걸려 바다 표면이 금빛으로 반사되고 파도가 여러 겹으로 밀려드는 사가미만 해변 풍경
같은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수면 반사가 강해서 눈을 제대로 못 뜨겠더라.

모래사장에 내려서니 파도 소리가 훨씬 크다. 사가미만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다. 파도가 세 겹, 네 겹으로 겹쳐 들어와서 서퍼 한 명이 그 안에 떠 있었다. 이 계절에 저러고 있는 게 대단해 보였다.

모래사장 눈높이에서 본 사가미만, 여러 겹의 하얀 파도가 밀려오고 멀리 서퍼 한 명이 보이는 풍경
모래에 발을 딛고 찍은 것. 파도가 겹겹이 들어온다. 가운데 검은 점이 서퍼.

이 해변 모래가 특이하다. 검은 모래와 밝은 모래가 섞여 있어서 발자국이 찍히면 검은 속살이 드러난다. 손으로 만져보면 알갱이가 굵고 까끌거린다. 화산 지형 영향이라고 들었는데, 이 부분은 정확한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다. 어쨌든 눈으로 보기에 확실히 다르다.

검은 모래와 밝은 모래가 섞여 얼룩덜룩한 해변 표면에 발자국과 작은 나뭇조각, 조개껍데기가 흩어져 있는 근접 사진
발자국이 찍힌 자리마다 검은 모래가 드러난다. 알갱이가 굵다.

모래 위에 구멍이 잔뜩 뚫린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스펀지처럼 숭숭 뚫려 있어서 한참 들여다봤다. 옆에는 누가 두고 간 초록색 삽 손잡이가 꽂혀 있었고.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아까 건널목의 소란이 좀 멀게 느껴진다.

검은 모래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밝은색 돌이 놓여 있고 왼쪽 위에 초록색 삽 손잡이가 보이는 근접 사진
구멍 뚫린 돌. 왼쪽 위 초록색은 누가 두고 간 모래삽.

다시 올라와서 본 마지막 장면

해변에서 계단을 올라와 인도에 서니 해가 거의 다 넘어가 있었다. 난간에 기대선 사람들, 세워둔 자전거와 스쿠터, 그 너머로 에노시마 섬과 하코네 방면 산줄기가 겹쳐 보였다. 교복 차림으로 온 사람과 일행이 난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진 다 찍고 나서 그냥 바다 보면서 시간 보내는 모습이었는데, 그게 이 장소에 제일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해질녘 국도변 난간 앞에서 교복 차림의 사람과 일행이 이야기하고 있고 뒤로 에노시마 섬과 산줄기, 세워둔 자전거가 보이는 모습
해 넘어갈 무렵. 왼쪽 끝 언덕 위 뾰족한 게 에노시마 전망대.

가는 법 정리

건널목 사진 한 장 찍으러 갔다가 반나절을 썼다. 사람 많은 게 싫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열차 한 번 보내고 나면 사람들이 우르르 빠진다. 그때 도로를 건너 해변으로 내려가면 완전히 다른 곳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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