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걸었던 오키나와 슈리성 — 슈레이몬에서 정전 옥좌까지, 아이 데리고 오후 늦게 오른 기록

나하 시내에서 슈리 언덕으로 올라가면 공기가 한 번 바뀐다. 국제거리 쪽의 뜨겁고 끈적한 공기가 여기서는 나무 그늘 사이로 조금 걸러진다. 오키나와 슈리성(首里城)은 류큐 왕국의 왕궁이었던 자리고, 지금은 성 전체가 공원으로 묶여 있다. 우리는 오후 네 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아이가 낮잠에서 늦게 깨는 바람에 어쩔 수 없…

오키나와 · 슈리성

나하 시내에서 슈리 언덕으로 올라가면 공기가 한 번 바뀐다. 국제거리 쪽의 뜨겁고 끈적한 공기가 여기서는 나무 그늘 사이로 조금 걸러진다. 오키나와 슈리성(首里城)은 류큐 왕국의 왕궁이었던 자리고, 지금은 성 전체가 공원으로 묶여 있다. 우리는 오후 네 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아이가 낮잠에서 늦게 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밀린 일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제일 잘한 선택이었다. 한낮의 슈리 언덕은 그늘이 거의 없다.

붉은 문 세 개를 차례로 지나며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슈레이몬(守禮門)이다. 편액에 '守禮之邦' 넉 자가 걸려 있는, 2천 엔 지폐에도 들어간 그 문. 사진으로 봤을 때는 훨씬 클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생각보다 아담하다. 대신 기둥의 주홍색이 저녁 햇빛을 받으면 사진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탄다. 아이를 안고 문 한가운데 서서 한 장 찍었다. 여기는 사람이 몰리는 자리라 보통 줄을 서야 하는데, 늦은 오후라 앞에 두 팀뿐이었다.

'守禮之邦' 편액이 걸린 주홍색 슈레이몬 아래에서 아이를 안고 선 모습, 뒤로 파란 하늘
슈레이몬. 늦은 오후 햇빛에 기둥 주홍색이 진해진다.

슈레이몬을 지나 오른쪽으로 몇 걸음만 옮기면 소노향우타키 석문(園比屋武御嶽石門)이 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나도 첫 방문 때는 못 보고 넘어갔다. 류큐 석회암을 쌓아 올린 작은 문인데, 국왕이 성 밖으로 나설 때 무사히 다녀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곳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문짝이 오래된 나무 그대로다. 계단 돌이 서늘해서 아이랑 잠깐 앉아 쉬었다. 여기는 그늘이 있어서 유모차 세워두고 물 먹이기 좋다.

류큐 석회암을 쌓은 소노향우타키 석문의 낡은 나무 문짝 앞 돌계단에 앉은 어른과 아이
소노향우타키 석문. 그늘이 있어 아이 쉬어가기 좋은 자리.

본격적인 성 안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환회문(歓會門)이다. 석축이 곡선으로 휘어 올라가고, 그 위에 붉은 기와 얹은 목조 문루가 얹혀 있다. 오키나와 성벽은 일본 본토 성곽과 선이 다르다. 직선으로 각지지 않고 물결처럼 이어진다. 문 앞 안내판에 한국어 설명도 함께 붙어 있어서 아이 기다리는 동안 읽어봤다. 아치 안쪽은 폭이 좁아서 사람이 몰리면 한참 정체된다.

곡선으로 휘어진 석회암 성벽 위에 붉은 기와 문루가 얹힌 환회문과 아치 앞에 줄지어 선 관광객들
환회문. 아치가 좁아 사람 몰리면 병목이 생긴다.

계단을 몇 번 더 올라가면 봉신문(奉神門)이 나온다. 벽 전체가 통째로 주홍색이라 하늘색과 대비가 강하다. 이 문 안쪽부터가 유료 구역이다. 표는 문 앞에서 끊는다. 요금은 시기마다 바뀌니 현장 확인을 권한다.

주홍색 벽면과 붉은 기와 지붕의 봉신문, 넓은 하늘에 얇게 퍼진 구름과 앞마당의 관광객들
봉신문. 이 문을 넘어서면 유료 구역이 시작된다.

가는 길과 체력 배분

모노레일 슈리역에서 걸어 올라오면 15분 안팎이다. 거리 자체는 짧은데 오르막이라 여름에는 체감이 두 배다. 유모차를 끌고 왔다면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결국 성 안에서는 아이를 안고 다니고 유모차는 짐칸이 됐다. 버스로 오면 슈리성 공원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언덕을 조금 덜 오른다. 렌터카는 지하 주차장을 쓰는데 오후 늦게 가면 자리가 남는 편이었다.

동선은 한 방향으로 돈다. 들어간 문으로 되돌아 나오는 구조가 아니라, 계속 앞으로 밀려 나가면서 구경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중간에 "아 저기 다시 보고 싶은데" 싶어도 되돌아가기가 번거롭다. 사진 찍고 싶은 곳은 그 자리에서 찍어두는 게 낫다.

우나 광장과 정전 앞

봉신문을 통과하면 시야가 확 열린다. 붉은색과 흰색 줄무늬가 동심원처럼 깔린 넓은 마당, 우나(御庭)다. 이 줄무늬는 의식 때 신하들이 서는 자리를 표시한 선이라고 한다. 그 끝에 정전(正殿)이 정면으로 서 있다. 지붕 양 끝에 용 조각이 올라앉아 있고, 처마 아래 채색이 촘촘하다. 아이는 유모차에 앉은 채로 손가락 하나만 세워 보였고, 나머지 가족은 그늘 없는 마당 한복판에서 땀을 흘렸다. 이 광장은 정말 그늘이 하나도 없다.

붉고 흰 줄무늬가 깔린 우나 광장 너머 주홍색 슈리성 정전 전경과 앞쪽 유모차에 앉은 아이
우나 광장에서 본 정전. 바닥 줄무늬는 의식 때 서던 자리 표시다.

덧붙여 둘 것이 있다. 이 사진은 2019년 10월 화재 이전에 찍은 것이다. 그 불로 정전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이 소실됐고 이후 복원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가면 내가 본 것과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방문 전에 공식 안내로 개방 범위를 꼭 확인하길 권한다.

신발 벗고 들어간 정전 안

정전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입구에서 비닐봉지를 받아 신발을 담아 들고 다닌다. 마루 감촉이 맨발에 서늘했다. 그게 이날 통틀어 제일 시원했던 순간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옥좌가 있는 어차유마(御差床)가 나온다. 검은 옻칠 위에 금 장식, 그 뒤로 '中山世土'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청나라 강희제가 내렸다는 편액의 복제본이다. 좌우 기둥에는 금색 용이 감아 올라간다. 붉은 로프로 접근을 막아뒀고, 바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게 되어 있다. 아이를 안고 서니 뒤에서 기다리던 팀이 웃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실내는 생각보다 어둡다. 플래시 없이 찍으면 손이 흔들리기 쉬우니 기둥에 팔을 기대고 찍는 편이 낫다.

'中山世土' 편액과 금색 용 기둥이 있는 슈리성 정전 옥좌 앞에서 아이를 안고 맨발로 선 모습
옥좌 앞. 신발을 벗고 들어가 맨발로 섰다.

정전을 빠져나오는 길에는 새 나무 냄새가 나는 복도가 이어진다. 마루가 아직 밝은 색이고 창호가 줄지어 있어서, 오래된 유적이라기보다 잘 지은 목조 신축 건물 같다. 실제로 이 일대는 옛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구간이다. 왼쪽 유리창 너머로는 붉은 기와 얹은 담이 보인다. 사람 없는 틈에 복도 끝까지 걸어봤는데, 발밑에서 나는 소리가 좋았다.

밝은 나무 마루와 격자 창호가 이어지는 복원 건물 실내 복도를 맨발로 걷는 사람
복원 구간 복도. 아직 나무 냄새가 남아 있었다.

놓치기 쉬운 실내 전시와 디테일

관람로 중간 실내 공간에 붉은 천으로 만든 큼직한 일산이 걸려 있다. 세 겹으로 늘어뜨린 천마다 봉황과 구름 무늬가 자수로 빼곡하다. 왕의 행차 때 머리 위에 씌우던 물건이고, 벽면에는 그 행렬을 그린 그림이 이어져 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가는데, 자수를 가까이서 보면 실 색이 대여섯 가지는 섞여 있다. 아이는 이 빨간 천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을 올려다봤다.

봉황과 구름 자수가 놓인 붉은 왕실 일산 전시물 아래 앉은 어른과 아이, 뒤편 벽에 왕 행렬 그림
왕의 행차에 쓰던 붉은 일산. 자수 색이 가까이서 봐야 보인다.

유모차나 휠체어를 쓴다면 알아둘 것. 계단이 많은 구간을 피해 갈 수 있게 엘리베이터가 있고, 벽에 서 있는 등신대 안내판이 방향을 알려준다. 류큐 복식을 입은 캐릭터가 부채로 오른쪽을 가리키고, 말풍선에 "エレベーター ご利用のお客様はこちらからどうぞ"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몰릴 때는 이 판이 가려져서 안 보인다. 계단 앞에서 유모차 들고 씨름하기 전에 벽 쪽을 한 번 훑어보길.

류큐 복식 캐릭터가 부채로 방향을 가리키는 등신대 안내판과 엘리베이터 안내 말풍선, 옆에 소화전
엘리베이터 안내 등신대. 유모차 일행은 이걸 먼저 찾자.

화장실에서 예상 못 한 걸 봤다. 세면대 수도꼭지가 시사(シーサー) 모양이다. 갈기와 이빨까지 새겨진 작은 사자가 세면대 쪽으로 목을 빼고 있고, 물은 그 옆 은색 관에서 나온다. 옆에는 알코올 소독기가 놓여 있고 거울 위에 "손을 씻은 뒤 소독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관광지 화장실까지 이런 걸 넣어둔 게 마음에 들어서 손 씻다 말고 사진을 찍었다.

시사 모양으로 조각된 세면대 수도 장식과 옆에 놓인 알코올 소독기, 타일 벽에 붙은 일본어 안내문
화장실 세면대의 시사 장식. 이런 데까지 신경 썼다.

관람로 끝 무렵에 나무 기둥과 다다미로 된 작은 휴게 공간이 있다. 안쪽에 접수대가 보이고 손소독제가 놓여 있다. 아이가 지쳐서 여기 마루에 올려놨더니 신발 벗고 다다미 위를 뛰어다녔다. 에어컨은 없지만 사방이 트여 있어서 바람이 통한다. 아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이런 자리가 정전 옥좌보다 고맙다.

나무 기둥과 다다미로 된 휴게 공간 마루에 앉은 어른과 그 옆에 맨발로 선 아이, 안쪽에 접수대
관람로 끝 다다미 휴게 공간. 바람이 통한다.

해 질 무렵에 내려오는 길

다 돌고 나오니 해가 문루 지붕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주차장 안내판의 빨간 P 표시와 라바콘이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직원 한 명이 진입로를 정리하며 걸어갔다. 오후에 올라오면 이 장면을 만난다. 낮에 왔다면 못 봤을 색이다.

해 질 무렵 슈리성 공원 진입로, 목조 문루 지붕 위로 걸린 해와 주차 안내판, 유모차를 세워둔 길가
문루 지붕 위로 해가 걸린 하산길. 늦게 온 값을 여기서 받았다.

아쉬웠던 건 시간 배분이다. 늦게 출발한 탓에 마지막 구간을 서둘러 지나쳤고, 성벽 위를 걸으며 나하 시내를 내려다보는 구간을 제대로 못 봤다. 다음에 간다면 문 닫기 두 시간 전에는 들어갈 생각이다. 정전 안에서 맨발로 걸었던 그 서늘한 감촉이 이 날의 기억 중 제일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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