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부다이 힐즈, 해 질 녘부터 밤까지 두 시간 걸어본 기록

도쿄 미나토구 아자부다이 힐즈(麻布台ヒルズ)에 도착한 건 겨울 오후 네 시 반쯤이었다. 도쿄타워에서 걸어 내려오다가 언덕 하나를 넘으니 갑자기 시야가 트였고, 아래로 계단식 정원이 펼쳐졌다. 동남아를 오래 돌다 오랜만에 도쿄에 들르면 제일 먼저 체감하는 게 공기 온도와 사람들의 걷는 속도인데, 여기는 그 두 가지가 다 뚜…

도쿄 · 아자부다이 힐즈

도쿄 미나토구 아자부다이 힐즈(麻布台ヒルズ)에 도착한 건 겨울 오후 네 시 반쯤이었다. 도쿄타워에서 걸어 내려오다가 언덕 하나를 넘으니 갑자기 시야가 트였고, 아래로 계단식 정원이 펼쳐졌다. 동남아를 오래 돌다 오랜만에 도쿄에 들르면 제일 먼저 체감하는 게 공기 온도와 사람들의 걷는 속도인데, 여기는 그 두 가지가 다 뚜렷했다. 12월 오후의 마른 바람, 그리고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 산책 속도.

계단식 정원 — 쇼핑몰이라기보다 언덕에 얹힌 마을

가든플라자 쪽 데크에서 내려다본 첫 장면이 이 동네의 성격을 다 설명해준다. 유리 상자 같은 저층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그 사이를 흙길과 돌계단이 잇는다. 정면 멀리 보이는 나선형 타워가 롯폰기 방향 스카이라인이고, 오른쪽 위로 뻗은 거대한 금속 캐노피가 모리 JP 타워 하부 구조물이다. 겨울이라 나무는 대부분 잎을 떨궜는데, 오히려 그 덕에 건물 사이 동선이 다 보였다.

해 질 녘 아자부다이 힐즈 계단식 정원 전경, 왼쪽에 EDITION 호텔 간판과 롯폰기 스카이라인, 오른쪽에 금속 캐노피 기둥
오후 네 시 반, 서쪽 건물 유리에 노을이 통째로 반사되던 순간. 왼쪽 상단 'EDITION' 간판이 도쿄 에디션 도라노몬.

중앙 잔디 광장 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굽이치는 아파트 건물, 기와지붕 얹힌 낮은 구조물, 그리고 뜬금없이 서 있는 목조 키오스크. 광장 한쪽엔 소형 굴착기와 파란 방수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구역이라 아직 손이 가는 중이었고, 사진에도 그게 다 찍혔다. 이런 건 홍보 사진에는 절대 안 나온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아자부다이 힐즈 중앙 광장, 목조 키오스크와 공사 중인 굴착기, 오른쪽에 에르메스 매장 유리 파사드
광장 오른쪽에 아직 정리 중인 조경 구역. 파란 천막과 라바콘이 그대로 보인다.

돌계단은 단 높이가 낮고 폭이 넓어서 캐리어를 끌어도 부담이 없다. 다만 흙길 구간이 꽤 길다. 비 온 다음 날 흰 운동화로 갔다가 밑창 옆면이 흙빛이 됐다.

길 잃기 쉬운 구조, 표지판을 믿어라

여기서 처음 온 사람이 제일 헤매는 지점을 짚자면, 이 단지가 평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것이다. 같은 '1층'이 구역마다 높이가 다르다. 지도 앱을 봐도 내가 지금 몇 미터 위에 서 있는지가 안 나와서, 목적지가 코앞인데 계단을 못 찾는 상황이 생긴다.

아자부다이 힐즈 야외 방향 표지판, 모리 JP 타워·가든플라자·중앙광장·롯폰기잇초메역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됨
이 표지판이 사실상 이 단지의 목차다. 색 블록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어 색만 따라가도 된다.

표지판을 읽어보면 구조가 정리된다. 왼쪽은 모리 JP 타워·타워플라자·브리티시 스쿨 인 도쿄, 그리고 가든플라자(뮤지엄·갤러리·마켓) 방향. 오른쪽은 레지던스 A와 자누 도쿄(Janu Tokyo) 호텔, 그리고 롯폰기잇초메역. 가든플라자 표지판에는 가미야초역(神谷町駅) 표시가 함께 붙어 있다. 역이 두 개 붙어 있는 셈인데, 히비야선 가미야초역 쪽이 지하로 바로 연결돼서 비 오는 날엔 이쪽이 낫다. 난바선 롯폰기잇초메역에서 오면 지상으로 올라와 언덕을 조금 걷는다.

도쿄타워에서 걸어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도보로 15분 남짓이고 내리막이라 힘들지 않다. 반대로 여기서 도쿄타워로 올라가려면 오르막이니 순서를 이렇게 잡는 게 편하다.

해가 지면 이 동네의 주인공이 바뀐다

다섯 시가 조금 넘자 하늘이 급격히 짙어졌다. 도쿄 겨울 해는 정말 빨리 떨어진다. 그리고 광장 건너편 에르메스 건물에 불이 들어왔다. 이 건물을 보려고 일부러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밤에 조명이 켜진 에르메스 아자부다이 매장 코너 전경, 유리 파사드 위로 초승달이 떠 있음
유리에 새겨진 물방울 무늬가 조명을 받아 떠오른다. 오른쪽 위 작은 점이 그날의 달.

유리 표면 전체에 불규칙한 점 패턴이 프린트돼 있어서, 낮에는 그냥 뿌연 유리인데 밤에는 안쪽 조명이 그 점들을 하나씩 밝힌다. 코너를 둥글게 처리한 것도 이때 티가 난다. 2층 매장 안 옷걸이와 조명 기구까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사진 찍으려고 몇 발짝 뒤로 물러났더니 뒤에 있던 사람도 같은 자리로 오더라.

야간 광장에서 올려다본 에르메스 건물과 그 위로 솟은 검은 타워, 왼쪽 멀리 EDITION 호텔 조명
광장 흙바닥에서 본 전체 구도. 밝은 유리 상자 위에 어두운 타워가 얹힌 대비가 이 건물의 핵심.

광장 가운데로 나가면 각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유리 저층부 위로 검은 마름모 패턴의 고층 타워가 그대로 이어져 올라가는데, 아래는 환하고 위는 거의 실루엣만 남는다. 광장 바닥이 포장이 아니라 다진 흙이라 발소리가 안 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도쿄 한복판에서 이런 질감의 바닥을 밟을 일이 흔치 않다.

야간 아자부다이 힐즈 광장 파노라마, 왼쪽에 조명 켜진 고층 빌딩군과 가운데 흰색 원뿔형 조형물, 오른쪽에 에르메스 매장
광장 왼쪽으로 도라노몬 방향 오피스 빌딩군이 통째로 보인다. 가운데 흰 원뿔은 광장에 설치된 조형물.

광장 서쪽으로 몸을 돌리면 도라노몬 쪽 오피스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저녁 여섯 시가 안 됐는데 창마다 불이 다 켜져 있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두 개의 도쿄가 한 화면에 들어온다. 아직 퇴근 못 한 도쿄와, 흙길을 산책하는 도쿄.

아래에서 올려다본 에르메스 저층부와 검은 고층 타워, 짙푸른 하늘에 달이 떠 있고 앞쪽에 흰 벤치가 놓여 있음
타워 꼭대기와 달을 한 프레임에 넣으려면 광장 남쪽 끝까지 물러나야 한다. 앞쪽 흰 물체는 앉을 수 있는 조형 벤치.

테이블은 그냥 앉아도 된다

돌아 나오는 길에 캐노피 아래 야외 좌석 구역을 발견했다. 흰 철제 테이블과 라탄 짜임 의자가 스무 개 넘게 놓여 있는데, 주문 안 해도 앉을 수 있는 공용 좌석이다. 노트북 꺼내서 삼십 분쯤 앉아 있었다. 겨울 저녁이라 손이 시렸지만 사람이 거의 없어서 자리는 골라 앉았다.

야외 공용 좌석의 흰 테이블과 의자들, 앞쪽에 노트북 화면, 건너편에 조명 켜진 에르메스 건물과 흰 원뿔 조형물
캐노피 아래 공용 좌석에서. 정면에 에르메스, 왼쪽에 흰 원뿔 조형물이 걸리는 자리가 제일 좋다.

같은 테이블 근처에 앉은 사람도 커피 없이 폰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사야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게 이 단지의 가장 실용적인 미덕이다. 다만 전원 콘센트는 못 찾았고, 12월 저녁 여섯 시엔 십오 분만 앉아 있어도 손끝이 굳는다. 오래 머물 생각이면 실내 타워플라자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

여기서 뭘 사거나 먹지 않아도 두 시간이 그냥 간다. 언덕을 계단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흙길을 낸 설계가, 결국 사람을 계속 걷게 만든다. 다음엔 벚꽃 필 때 와서 잎 없던 저 나무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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