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둥 남쪽 카와 푸티(Kawah Putih) 화산호수, 그리고 내려와서 먹은 소고기 한 상 — 하루짜리 기록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 시내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면 찻잎 밭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창문 밖 공기가 확 서늘해진다. 이날 도착한 곳은 시아떠르(Ciwidey) 방향 산속에 있는 화산 분화구 호수, 카와 푸티다. 자바섬 서부의 파툭하(Patuha) 화산 안쪽에 고인 물인데, 사진으로 볼 때는 "포토샵 아닌…

반둥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 시내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면 찻잎 밭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창문 밖 공기가 확 서늘해진다. 이날 도착한 곳은 시아떠르(Ciwidey) 방향 산속에 있는 화산 분화구 호수, 카와 푸티다. 자바섬 서부의 파툭하(Patuha) 화산 안쪽에 고인 물인데, 사진으로 볼 때는 "포토샵 아닌가" 싶었던 그 우윳빛 청록색이 실물로는 더 비현실적이었다. 반둥의 화산이 신비하게 아름답다는 말, 나는 여기 서서야 이해했다.

능선에서 처음 내려다본 순간

주차장에서 셔틀을 타고 올라가 능선 쪽 전망 포인트에 먼저 섰다. 구름이 왼쪽 사면을 통째로 삼키고 있었고, 그 사이로 민트색 물이 툭 드러났다. 온도는 체감상 서울 늦가을 수준 — 반둥 시내에서 반팔로 출발했다가 여기서 팔이 오소소했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는 무조건 챙기시길.

구름에 반쯤 가린 분화구 능선 아래로 우윳빛 청록색 화산호수가 보이고, 앞쪽에는 죽은 나무와 붉은 새순 관목이 있는 전경
능선 전망 포인트. 왼쪽 사면은 구름이 통째로 먹었고, 오른쪽 아래로 호숫가 나무 데크가 보인다.

사진에 나오는 앙상한 검은 나무들은 죽어서 방치된 게 아니라, 이 땅의 조건 그 자체다. 물과 흙에 유황 성분이 강해 큰 나무가 잘 못 버틴다. 그런데 그 검게 탄 듯한 가지 끝에서 붉은 새순이 올라오는 걸 봤다. 회색과 검정뿐인 풍경에서 이 부분만 색이 튀어서, 한참 쪼그려 앉아 들여다봤다.

검게 그을린 듯한 나뭇가지 끝에서 붉은빛과 연둣빛 새순이 돋아난 모습, 바닥은 흰 자갈밭
검은 가지 끝의 붉은 새순. 바닥이 흰 자갈이라 색 대비가 더 세다.

호숫가로 내려가면 냄새부터 온다

계단을 따라 물가까지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부터 삶은 달걀 썩은 것 같은 유황 냄새가 훅 들어온다. 심한 날엔 목이 칼칼할 정도라서, 입구 근처에서 마스크를 파는 이유가 있다. 나는 5분쯤 있다가 기침이 나서 잠깐 물러섰다가 다시 갔다. 호흡기 예민하거나 아이 데리고 오는 분은 마스크 하나 사서 들어가는 게 낫다.

안개 낀 분화구 안, 청록색 호수 왼쪽 자갈밭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오른쪽으로 긴 나무 데크와 노란 오두막이 뻗어 있는 풍경
호숫가로 내려온 뒤. 왼쪽 자갈밭에 사람들이 몰려 있고, 오른쪽 나무 데크는 물 위로 길게 나 있다.

물빛은 시간과 날씨에 따라 계속 바뀐다. 이날 오전 늦게는 흐린 하늘 때문에 회색이 섞인 옥색이었는데, 구름이 잠깐 걷힌 사이에는 형광에 가까운 민트로 튀었다. 물 위 데크는 끝까지 걸어갈 수 있고, 데크 끝 근처 바위 틈에서 흰 수증기가 계속 새어 나온다. 손 넣지 말라는 뜻이다 — 실제로 뜨겁다.

수면 가까이에서 찍은 세로 사진, 청록색 물 위로 나무 데크가 이어지고 건너편 바위에서 흰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데크 위에서. 건너편 바위 틈으로 유황 수증기가 새어 나온다.

위치와 가는 법 — 반둥에서 당일치기가 되긴 한다

반둥 시내에서 카와 푸티까지 거리 자체는 멀지 않은데, 시아떠르 방향 산길이 좁고 주말엔 정체가 심해서 시간이 예상보다 늘어진다. 나는 오전에 출발했는데도 편도가 두 시간 넘게 걸렸다. 오후에 가면 구름이 몰려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경우가 흔하니, 아침에 출발해서 오전 중에 분화구에 서 있는 걸 목표로 잡는 게 좋다. 아래 지도는 이날 사진을 찍은 지점 좌표다.

입장료와 셔틀 요금은 내외국인 요금이 다르고 주중·주말에도 차이가 있는 데다 수시로 바뀐다. 여기서 숫자를 적어두면 그게 오히려 틀린 정보가 되니 적지 않는다 — 매표소 전광판에서 현장 확인하는 걸 권한다. 다만 현금(루피아)은 꼭 넉넉히 챙겨 가시길. 산 위쪽은 카드가 안 되는 데가 많다.

내려오는 길, 숲 안쪽에 있는 목조 카페에 들렀다. 나무 기둥과 슬레이트 지붕만으로 벽을 거의 안 세운 구조라, 앉아 있으면 밖에서 나무고사리가 그대로 들어온다. 산 공기가 차가워서 뜨거운 걸 손에 쥐고 앉아 있기 딱 좋았다. 주차장이 바로 앞이라 기사님 기다리기에도 편했다.

숲을 향해 열린 목조 카페 내부, 라탄 펜던트 조명과 등나무 접이식 의자, 창밖으로 나무고사리와 주차된 흰 승합차가 보이는 모습
내려오는 길에 들른 목조 카페. 벽이 거의 없어서 숲 냄새가 그대로 들어온다.

산에서 내려와 먹은 순다식 소고기 한 상

서자바는 순다(Sunda) 문화권이라 음식 결이 발리나 자바 동부와 또 다르다. 생채소(라랍)를 곁들이고, 삼발을 따로 내고, 튀긴 샬롯을 아낌없이 얹는다. 화산에서 몸이 식은 채로 들어가 시킨 이 상차림이 이번 여행에서 제일 잘 먹은 끼니였다.

먼저 나온 건 뼈 붙은 소갈비 구이. 그물 위에 통째로 얹혀 아직 지글거리는 채로 왔고, 겉면 간장 양념이 캐러멜처럼 굳어 반들거렸다. 위에 얹힌 튀긴 샬롯이 향의 8할이다. 단맛이 꽤 강하니 옆 접시의 상추·오이랑 번갈아 먹어야 끝까지 물리지 않는다.

검은 그물 화로 위에 올려진 진한 간장 양념 소갈비 구이, 위에 튀긴 샬롯이 수북하고 옆 접시에 상추와 오이가 있는 모습
뼈째 나온 소갈비 구이. 그물 아래 불이 살아 있어서 마지막까지 뜨겁다.

그다음이 이날의 승자. 바나나잎에 싼 밥(나시 바카르)에 크루푹, 튀긴 두부, 소고기 조림, 그리고 삼발 한 종지가 함께 나온 1인 세트다. 바나나잎을 열면 훈연 향이 확 올라오는데, 밥알에 잎 냄새가 배어 있다. 삼발은 보기보다 맵다 — 처음엔 젓가락 끝으로 조금만 찍어서 간을 보시길. 나는 얕보고 한 숟갈 넣었다가 물을 두 잔 마셨다.

흰 접시에 바나나잎으로 싼 구운 밥, 큰 크루푹, 노란 튀김두부, 소고기 조림, 붉은 삼발 종지와 상추 오이가 함께 담긴 한 상
바나나잎에 싸서 구운 밥 한 상. 왼쪽 붉은 종지가 삼발인데, 한 숟갈은 무리다.

꼬치 사테도 시켰다. 나오자마자 놀란 게 위에 얹힌 고추 양이다. 토마토·양파와 함께 생 쥐똥고추를 썰어서 산처럼 얹어 준다. 고기 자체는 숯 향이 진하고 달짝지근한데, 고추를 같이 집으면 그 단맛이 싹 지워진다. 나는 세 개쯤 먹고 고추를 옆으로 밀어냈다 — 인도네시아 매운맛 기준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갈색 무늬 접시에 담긴 대나무 꼬치 소고기 사테 위로 생 쥐똥고추와 토마토, 자색 양파를 수북이 얹은 모습
소고기 사테. 위에 얹힌 게 다 생고추다. 각오하고 집어야 한다.

기름진 걸 계속 먹다 보면 필요해지는 게 공심채 볶음(깡꿍)이다. 간장 베이스 국물이 접시 바닥에 조금 고여 있고, 토마토와 샬롯이 같이 볶여 나온다. 줄기 아삭한 식감이 사테 다음에 딱 맞는다. 어느 식당을 가든 이건 값이 싼 편이라, 두 명이면 무조건 한 접시 추가하는 걸 추천한다.

흰 접시에 담긴 간장 국물의 공심채 볶음, 토마토 조각과 튀긴 샬롯이 위에 얹혀 있는 모습
공심채 볶음. 고기 사이에 하나 있으면 상 전체가 편해진다.

마지막은 소꼬리탕(솝 분뚯)이다. 스테인리스 냄비째 고체연료 위에 올려 나와서, 먹는 내내 끓는다. 국물은 맑고 후추 향이 강한데 기름기는 의외로 적다. 뼈에서 살이 그냥 떨어지고, 당근과 파가 들어가 한국식 갈비탕과 결이 비슷하다. 산에서 유황 냄새 맡으며 얼었던 몸에 이걸 한 국자 넣으니 그제서야 하루가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고체연료 위에서 끓고 있는 스테인리스 냄비의 맑은 소꼬리탕, 뼈와 파 당근이 보이고 옆에 불붙은 연료 용기가 놓인 모습
끓는 채로 나온 소꼬리탕. 왼쪽 유리컵에 든 게 불붙은 고체연료다.

다녀와서 남은 메모

화산 하나 보고 밥 한 끼 먹은 게 전부인 하루였는데, 저녁에 숙소 돌아와 사진을 넘겨보니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검게 죽은 나무 사이에서 붉은 새순이 올라오던 그 장면과, 몸 녹이며 떠먹던 소꼬리탕 국물이 같은 날의 기억이라는 게 좀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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