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차드 로드 The Centrepoint, 아이 데리고 반나절 버틴 기록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에서 쇼핑몰을 고를 때 나는 ION이나 다카시마야 쪽으로 잘 안 간다. 사람이 너무 많고, 아이랑 같이 다니면 30분 만에 지친다. The Centrepoint는 서머셋(Somerset) 쪽으로 내려온 위치라 오차드 한복판보다 확실히 헐렁하다. 이날도 평일 오후였는데,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서 아래를 내…
오차드 로드 · The Centrepoint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에서 쇼핑몰을 고를 때 나는 ION이나 다카시마야 쪽으로 잘 안 간다. 사람이 너무 많고, 아이랑 같이 다니면 30분 만에 지친다. The Centrepoint는 서머셋(Somerset) 쪽으로 내려온 위치라 오차드 한복판보다 확실히 헐렁하다. 이날도 평일 오후였는데,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사람이 몰려 있는 구간이 거의 없었다. 실내는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반팔로만 다니면 한 시간쯤 지나 팔뚝이 서늘해지는, 싱가포르 몰 특유의 그 냉방이다.
금색 에스컬레이터가 뚫고 올라가는 아트리움
이 몰의 인상은 가운데 뻥 뚫린 아트리움 하나로 정리된다. 층수 표시가 파란 사각형으로 2, 3, 4, 5 이렇게 붙어 있고, 그 사이를 금색으로 도금된 에스컬레이터 벽면이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사진으로 보면 화려해 보이는데 실제로 서 있으면 좀 낡은 금색이다. 90년대 몰의 공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1층 바닥에 빨간 카펫을 깔고 가전 특가전을 하고 있었다. 슬로우 주서, 커피머신, 전기밥솥, 접시 세트 같은 게 매대마다 쌓여 있고 직원들이 시연을 한다. 오차드 로드에서 이런 재래식 특가전을 보는 게 오히려 반가웠다. 관광객용 매대가 아니라 근처 사는 사람들이 밥솥 보러 오는 자리다. 가격표는 봤지만 행사가라 지금 적어봐야 의미가 없다.

입점 브랜드를 보면 이 몰의 성격이 드러난다. BIRKENSTOCK, iORA, ACANTHUS, 그리고 4층과 5층에 걸쳐 있는 ROBERT PIANO. 피아노 가게가 오차드 로드 몰에 두 층을 쓰고 있다는 건, 여기가 명품 순례 코스가 아니라 생활 쇼핑몰이라는 뜻이다. 1층 한쪽에는 스타벅스가 있고 그 옆으로 GASTRO 간판이 붙어 있다. 명품 매장 사진 찍으러 온 사람에게는 시시할 수 있다.
위치와 접근성 — 서머셋 역에서 걸어오는 게 낫다
오차드 MRT보다 서머셋(Somerset) MRT가 가깝다. 313@Somerset 쪽으로 나와서 오차드 로드를 따라 걸으면 몇 분 안에 도착한다. 문제는 그 몇 분이다. 낮 12시에서 3시 사이에 오차드 로드를 걸으면 등이 완전히 젖는다. 나는 지하 연결 통로와 몰 내부를 타고 이동하는 쪽을 택했다. 오차드 일대는 몰끼리 실내로 이어지는 구간이 많아서, 바깥으로 나오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동선이 체력을 아낀다.
이 몰의 진짜 주인공은 장난감 층이다
여기 오는 이유의 절반은 위층 장난감 매장이다. 유리 진열장 안에 실물 크기에 가까운 티라노사우루스가 한 마리 서 있는데, 목에 손글씨 팻말이 걸려 있다. "PLEASE DO NOT TOUCH THE DINOSAUR! THANK YOU." 느낌표까지 붙은 걸 보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손이 닿았는지 짐작이 간다. 아이가 진열장에 코를 붙이고 한참을 서 있었다.

다른 매장에는 인조 잔디를 깔고 공룡 피규어를 종류별로 세워둔 디오라마가 있었다.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나무 아래 목을 뻗고, 티렉스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안킬로사우루스가 바위 옆에 엎드려 있다. 위에는 익룡을 실로 매달아 날려놨다. 파는 물건을 그냥 쌓아둔 게 아니라 장면을 만들어놨다. 이런 진열은 아이가 안 지나친다.

가장 오래 붙잡힌 건 다른 쪽 쇼윈도였다. 진짜 목재로 만든 대형 범선에 슈타이프(Steiff) 곰들이 잔뜩 타고 있다. 돛에 매달린 곰, 조타기를 잡은 곰, 갑판 난간에 기대선 곰. 배 아래는 파란 종이를 구겨 바다를 만들고 책 페이지를 접어 산호를 세워놨다. 오른쪽으로 HABA 코너가 이어진다. 슈타이프와 HABA를 이렇게 붙여 파는 매장은 가격대가 어떤지 굳이 안 봐도 짐작이 되는데, 실제로 태그를 뒤집어 보고 조용히 내려놨다.

서점 매대에서는 DK에서 나온 Star Wars: The Visual Encyclopedia가 눈에 띄었다. 비닐로 싸여 있어서 속을 못 보는 게 아쉬웠는데, 위쪽 주황색 띠에 "While stocks last"라고 붙어 있었다. 싱가포르 서점은 영어 원서를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싸게 살 수 있는 경우가 있어서, 아이 책이나 도감류는 여기서 한 번 훑어볼 만하다.

공용 통로에는 동전 넣는 키디 라이드가 몇 대 놓여 있다. 파란 경찰차, 빨간 소방차, 파란 버스. 우리 아이는 'SUPER COP! CATCH THE THIEF' 파란 차에 올라타서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이런 기계는 대개 동전만 받으니 잔돈을 미리 챙겨두는 게 좋다. 한 번 태우면 1~2분이라 어른 입장에서는 짧고, 아이 입장에서는 한 번으로 안 끝난다.

바쿠테 한 그릇으로 마무리
냉방 안에서 반나절 돌면 뜨거운 국물이 당긴다. 싱가포르식 바쿠테(Bak Kut Teh)를 시켰다. 말레이시아식 검은 국물이 아니라 싱가포르 테오츄(Teochew) 스타일, 그러니까 맑고 후추가 세게 들어간 쪽이다. 갈비 두 대가 담긴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면 후추가 목 뒤로 확 올라온다. 마늘 향도 진하다.

같이 나온 다진 고추 소스는 그냥 찍어 먹지 말고 옆에 있는 간장을 조금 부어 섞는 게 낫다. 현지 사람들이 그렇게 먹는다. 고기를 찢어서 그 소스에 담갔다가 밥 위에 올리면 밥 한 공기가 금방 사라진다.

바쿠테 집 대부분은 국물을 무료로 리필해준다. 국물이 줄었을 때 직원에게 그릇을 들어 보이면 주전자를 들고 온다. 처음 온 사람들이 이걸 모르고 한 그릇만 먹고 일어난다. 후추가 세서 아이는 국물을 못 먹었고, 결국 밥에 고기만 얹어줬다. 아이 데리고 갈 거면 국물 없이 먹을 반찬을 하나 더 시키는 편이 낫다.
가격은 내가 적어두지 않아서 정확히 옮기지 않겠다. 매장마다 다르고 오차드 로드 안쪽은 호커센터보다 확실히 비싸다. 주문 전 메뉴판에서 확인하시길.
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들
- 오차드 MRT보다 서머셋(Somerset) MRT가 가깝다. 낮에는 실내 통로를 최대한 이용하는 게 체력에 도움이 된다.
- 냉방이 세다. 아이나 어른이나 얇은 겉옷 하나는 가방에 넣어 가는 게 좋다.
- 키디 라이드는 동전이 필요하다. 잔돈을 미리 확보해 두자.
- 1층 특가전은 상시가 아니다. 내가 갔을 때 있었던 가전 행사는 기간 한정이었다.
- 매장 구성과 영업시간은 바뀐다. 특정 브랜드를 보러 갈 계획이라면 현장 확인을 권한다.
화려한 걸 기대하고 오면 실망할 몰이다. 대신 사람에 치이지 않고, 아이가 유리창에 코를 붙이고 공룡을 보는 동안 옆에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다. 오차드 로드를 종일 걷다가 다리가 풀렸을 때 들어와 앉기 좋은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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